역대급 웹툰이었던 '타인은 지옥이다'가 드라마화 된지 약 2달만에 종영했다. 이전 포스팅에서 말했던 것 처럼 작품 초반에 왕눈이 역할이 유기혁에서 서문조로 바뀌며 스토리가 다르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예상대로 웹툰과 드라마는 비슷하지만 다른 결말을 맞이했다.

서사에서 캐릭터가 곧 플롯이다. 캐릭터의 설정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고, 달라진 행동이 다른 스토리라인을 그린다. 타인은 지옥이다 드라마에서 많은 캐릭터의 설정이 조금씩 달라졌고, 그로 인해 원작과는 조금 다른 스토리로 끝맺음을 맺게 됐다.

이런 관점으로, 캐릭터 설정의 차이를 분석하여 드라마 / 웹툰 전체적인 스토리 차이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윤종우

트라우마에서 사이코패스로

 

정상 수준에서 서서히 미쳐갔던 원작의 윤종우와는 달리, 드라마 윤종우는 중반 부분부터 얼 빠진 수준 이상으로 사람이 미쳐갔다.

웹툰 윤종우는 궁지에 몰린 쥐 처럼 겁에 떨다, 결국 고벤저스에 의해 감금 당한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 탈출 및 구출(지은, 창현)을 위해 '정말 어쩔 수 없이' 고벤저스들을 죽이고 그곳에서 탈출한다. 그리고 '트라우마'가 남은 채 마무리된다.

드라마 윤종우는 겁에 떨긴 했지만, 내면의 폭력성이 작품 초반부터 조금씩 새어나왔다. 궁지에 몰린 쥐가 아니라 서서히 미친 개가 된 종우는, 서문조(왕눈이)가 깔아놓은 빅픽처의 말이 되어 철저히 그의 의도대로 움직인다.

결국 미친 사람을 넘어, '사이코패스 살인자'로 변한다.

전투력도 달라졌다. 원작 종우보다 더 사나워지긴 했지만, 체격이 크게 작아졌고 그로 인해 고등학생 3명과의 싸움도 겨우 이긴다. (원작 종우는 cctv 없는 것까지 확인한 후, 큰 피해 없이 3명을 모두 때려잡는다)

드라마 속 종우는 원작 보다 훨씬 더 빠르고 깊게 미쳐갔다. 저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데 왜 진작 고시원을 나가지 않는가? 하는 개연성에 의문이 들 만큼 말이다.

원작의 종우는 정말 서서히 미쳐갔기 때문에 그가 미쳐가는 과정, 그로 인한 행동 변화, 움직임 등등이 모두 납득할 수준이었다면. 드라마 속 윤종우는 결말을 위해 제작진이 어거지로 끌고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살인마 소굴이라고 거의 확정하는 분위기에서 여자친구인 지은을 구하겠다고, 경찰에 신고도 안하고 들어가는 종우나 그걸 따라 들어가는 후임 창현이나 도저히 납득이 안갔다.

(여경에게 이야기 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신고가 아닌, 경찰 친구에게 얘기하는 수준이다. 이전에 고시원을 신고했다 장난전화 취급을 받는거로 어느정도 개연성을 부여하려 한 것 같다. 하지만 여자친구가 납치된 것 같으니 도와달라고 신고하면 경찰은 출동할 수 밖에 없다.)

원작의 윤종우는 고시원을 다시 돌아간 것도, 도망치기 직전 자신의 신상정보를 숨기기 위해 노트북과 짐을 챙기기 위함이었지만, 드라마의 윤종우는 여자친구인 지은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인도 불사)

고시원으로 되돌아간 이유가 다르니, 마음가짐도 다르고, 결국 스토리도 다르게 전개되어 다른 결말을 맞이했다.

+) 웹툰에서 202호에 살았던 종우였기에, 드라마 속 묵었던 모텔의 호수도 202호였다는 이스터에그가 있다.

2. 왕눈이 / 서문조 X 유기혁

'귀신'에서 사이코 집착남으로

 

 

웹툰에서 202호에 사는 종우와 203호에 사는 왕눈이, 그리고 201호에 사는 누군가(결국 그도 왕눈이었음)가 있었다.

그 '누군가'를 형상화 한 것이 서문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의 왕눈이는 주인공에게 관심을 갖긴 했지만, 서문조 처럼 스토커 수준으로 집착하거나 그를 살인마로 키울 생각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치과의사도 아니었다. 설정만 보면 오히려 유기혁이 더 왕눈이에 가깝다. 이것이 이전 포스팅에서 웹툰 속 왕눈이는 '유기혁'이고, '서문조'는 왕눈이 포지션에 있는 대체 캐릭터라고 칭한 이유다.

서로의 성향이 다르니 결국 종우가 살인하는 동기도 달라지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원작에서 종우가 살아남은 건 왕눈이와는 관계 없이 온전히 본인의 기지였지만, 드라마는 종우가 살인을 하도록 판을 깔아준다.

사망한 원인도 다르다. 서문조는 윤종우를 완벽한 살인마로 만들기 위해, 본인이 모든 죄를 끌어안고 윤종우에게 죽음을 선택한다. 반면 왕눈이는 키위에게 망치로 맞아 사망한다. (그럼에도 즉사하진 않아 정말 귀신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서문조가 사이코 살인마의 정점을 보여줬다면, 왕눈이는 마치 '귀신' 같은 존재로 '얘가 정말 사람이 맞을까?' 하는 미스터리한 공포를 심어주었다.

설정이 가장 많이 달라진 캐릭터인 왕눈이 / 서문조 X 유기혁 이었다.

3. 키위 / 변득종, 변득수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말 더듬고 실실 웃는 키위와 정색하고 말 안더듬는 키위, 둘을 변득종과 변득수로 나눠놓았다.

왕눈이에 불만을 갖게 되는 원인도 다르다.

키위는 항상 자기 마음대로 하며, 자신을 부하 부리듯 다루는 왕눈이에게 반감으로 그를 죽인다.

반면 변득종은 형인 변득수를 죽인데에 대한 불만이 더 컸다.

원작에선 왕눈이를 죽이는 결정적 역할을 하지만, 드라마에선 큰 활약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한편 서문조를 항상 증오하고, 죽일 것 같았던 변득종이 왜 종우에게 달려들었는지는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개연성 떨어지는 전개다. 반전 결말을 위해 어거지로 끼워맞춘 느낌.

쌍둥이임이 처음 밝혀졌을 때도 그렇다. 종우 보다 먼저 살고 있었던 조폭 아저씨 조차 키위가 쌍둥이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설정.

쌍둥이임이 밝혀진 후 부턴, 대놓고 돌아다니는데, 그럴거면 왜 동생인 척 연기하며 숨어지냈던 걸까?

4. 히키코모리 / 홍남복

히키코모리에서 변태사이코로

 

특별한 별명이 없어서 '히키코모리'라고 부른다.

원작과 비슷한 성격에 변태 + 조선족 이라는 설정이 추가됐다. 또, 원작에선 크게 모자란 모습으로 그러졌지만, 드라마에선 사이코 변태라는 점 빼면 말도 멀쩡히 잘 하고 지능도 정상수준으로 보인다.

드라마 속에선 자신이 서문조(왕눈이)를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자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원작에선 그냥 조용하고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한다.

5. 고시원 아줌마 / 엄복순

아줌마에서 악마로

 

왕눈이의 엄마이자, 특별함 없는 고벤져스의 일원이었으나, 드라마에선 그 위상이 떡상했다.

약물을 이용해 고시원 외부에서도 범죄를 저지르고, 고벤져스 내 평가에서 서문조에 준하는 위엄을 갖고 있다.

6. 민지은

걱정에서 경멸로

여전히 종우의 고향에 살고 있던 웹툰의 지은이지만, 드라마 속 지은이는 종우보다 먼저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웹툰에선 종우를 걱정하는 모습이 더 많이 비춰졌던 지은이지만, 드라마에선 걱정 보단 오히려 그를 더 몰아세우며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한다.

종우와의 만남 이후, 웹툰 지은이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지만(왕눈이가 납치했다는 건 거짓말), 드라마 지은이는 실제로 잡혀 종우를 흑화하게 한다.

7. 사장 형 / 신재호

빛에서 찌질이로

 

드라마에서 찌질한 꼰대의 모습을 보여줬던 재호와는 달리, 웹툰에선 '빛재호'라며 칭송을 받았다.

물론 개인주의에 어느정도 꼰대 기질이 있긴 했지만, 모두 주인공을 걱정해서 한 말들과 행동이었다.

왕눈이와의 갈등이 일어났을 때도, 웹툰 재호는 철저히 주인공 편을 들어주며, 주인공 입장에서 화를 내주지만, 드라마 재호는 종우와의 갈등에 끼어들고 자신을 불쾌하게 했다는 이유로 화를 낸다.

8. 병민씨 / 박병민

진상에서 찐따로

 

 

웹툰과 드라마 둘 다 찌질한 건 변함이 없으나, 웹툰의 병민씨는 드라마 처럼 찐따 같지는 않았다. 말을 더듬지도 않았고, 크게 소심하지도 않았다.

9. 경찰

 

본편에 없던 경찰 캐릭터들이, '타인은 지옥이다 - 연쇄묘 살인사건' 이라는 외전을 통해 등장해 드라마와 연계됐다. 그런데 아무래도 드라마 작가 / 감독이 우리나라 경찰에 원한이 있는 듯 하다.

물론 경찰들이 대응을 잘못한 경우도 있지만, 너무 무능력하고 의지 없는 모습으로 그린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소정화 순경을 제외한 경찰들은 무능력의 끝판왕을 보여주며, 소정화 순경 역시 능력 대비 무리한 행동을 자주 하여 불안감을 일으킨다.


웹툰과 플롯을 달리하여 다른 결말을 맞이한 시도는 좋았지만, 그 개연성에 의문이 드는 점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불안하고 의심하면서도, 돈 몇푼 때문에 끝끝내 고시원에서 붙어사는 종우나, 신고를 받고도 출동하지 않고 장난전화로 치부해버리는 경찰, 위험한 곳을 돌아다니는 소정화 순경.

특히 마지막회의 개연성은 정말 안타까웠다. 왕눈이를 죽이러 갔던 키위가 왜 종우와 싸우다 죽었으며, 소정화 순경은 홍남복을 죽인 걸 엄복순으로 확신한건지.

마지막 반전을 위한 어거지 설정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스릴감과 몰입감이 뛰어나서 재미를 주는데는 성공적인 드라마였지만, 플롯의 완성도에선 다소 아쉽게 느껴졌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메세지를 너무나도 1차원적으로 해석한 것도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고시원을 '타인이 만들어낸 지옥'으로 표현하는데, 너무 대놓고 지옥인 곳이라 '타인은 지옥이다' 라는 거창한 명언을 갖다 붙이기 좀 민망한 느낌? 차라리 종우가 미쳐가는 와중에,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미친 사람 취급만 하는 지은이나 회사 동료들로 인해 더더욱 미쳐가는 종우의 모습이 '타인은 지옥이다' 라는 메세지가 어울린다고 본다.

다만 어설프게 원작을 따라하기 보다, 드라마에 맞게 각색하여 전개해나간 부분에 대해선 높게 평가하고 싶다.

어쨌거나 꼬박꼬박 본방을 챙겨볼 만큼 너무나도 재밌게 봤고, 또 내 취향이었던 드라마였기에 앞으로도 이런 스릴러 작품들이 많이 나와줬으면 좋겠다.

 

알리타 : 배틀엔젤 줄거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도 박사'는 헌터 워리어들에게 거의 무상으로 기계 팔, 다리 등을 수리해주는 의사이자 엔지니어다.

그는 고철 처리장에서 부품들을 뒤적이다, 아직 생명이 남아있는 사이보그의 머리를 발견한다.

사이보그는 10대 소녀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이도 박사는 그 머리에 자신의 (죽은)딸에게 주려 했었던 몸을 사이보그에게 이식시켜줄 뿐만 아니라, 딸의 이름이었던 '알리타'를 그녀에게 주었다.

알리타는 이전 기억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모든것이 신기했던 그녀는 이도 박사와 마을을 구경하다, '휴고'를 만나 천눈에 반하게 된다.

자신을 딸처럼 대하며 행동을 통제하려는 이도 박사와는 다르게,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것을 알려주는 휴고에게 알리타는 더더욱 끌리게 된다.

한편 고철도시에는 여성들을 죽이고, 비싼 부품들을 훔쳐가는 범죄자들로 인해 시끌벅적했다.

알리타는 우연히 이도 박사가 손에 피를 뭍힌 채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를 의심하게 된다.

이도 박사의 범죄 행동을 확인하고, 저지하기 위해 그를 미행하던 알리타.

알고보니 이도박사는 '헌터워리어(현상금 사냥꾼)' 이었으며, 살인범을 잡기 위해 매복하고 있던 것이었다.

알리타의 개입으로, 이도 박사는 역으로 함정에 빠지게 된다.

살인범들과의 전투 도중, 알리타는 본능적으로 발휘된 격투기술 '기갑술'로 그들을 제압하고, 과거의 기억이 일부 돌아오게 된다.

'99번' 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우주복을 입은 채, 달에서 전투를 하는 기억이었다.

그런 그녀의 진정한 정체가 밝혀지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휴고가 자신만 아는 곳이라며 'URM(화성연합군)'의 추락한 우주선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알리타는 무언가에 이끌린듯 우주선 안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그 우주선은 알리타에게 반응했다. 우주선 안을 돌아보던 알리타는 그곳에서 '광전사의 육체'를 발견한다.

광전사의 육체란 URM에서 만들어진 전쟁용 바디로, 고철 도시에선 만들 수 없을 정도로 고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알리타는 그것을 갖고 이도 박사에게 가지만, 이도 박사는 이를 거절한다.

알리타는 사실 URM의 광전사 출신이었고, 고철 도시 위에 떠있는 공중도시, 자렘을 무너트리고 그곳의 지배자인 노바를 죽이는 임무를 갖고 있었다.

알리타가 자렘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 노바는 자신의 하수인들을 시켜 알리타를 제거하려 한다.

그녀는 노바의 하수인 중 하나인 그루위시카(이전의 살인범 패거리 중 하나)와 싸우다 몸이 대부분 박살나게 된다.

결국 이도 박사는 아무도 그녀를 해칠 수 없도록 광전사의 몸을 그녀에게 심어준다.

그 이후에도 알리타는 휴고와 계속 붙어냈고, 결국 사귀기까지에 이른다.

휴고는 알리타가 있는 고철도시가 아닌, 저 높은 공중도시, 자렘에 가고싶어하는 꿈이 있었다.

자렘에 가기 위해선 큰 돈이 있어야 했기에, 휴고는 불법적인 방법(사람들의 기계 팔,다리를 잘라서 암시장에 팔곤 했다)으로 돈을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알리타를 사랑하게 된 후, 이런 일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 친구들을 찾아가 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던 와중 노바의 흑막으로 인해, 휴고는 알리타가 구하러 왔음에도 헌터워리어인 '자팡'의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할 뻔 한다.

자팡이 알리타에게 "휴고는 사실 살인범이다"라며 혼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지를 발휘하여, 휴고의 목을 자른 척 하고 이도 박사에 데려가 기계 육체를 붙여준다.

분노한 알리타는 복수를 위해 노바의 하수인인 벡터를 찾아가 그를 죽인다.

집으로 돌아온 알리타는 이도 박사를 통해 '휴고'가 죽지 않았음을 안 관리국이 그를 찾고 있다는 사실과, 관리국을 피해 휴고가 자렘으로 가기 위해 파이프를 기어오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재빨리 휴고를 뒤쫓아가, 자신과 함께 고철도시로 다시 돌아가자고 그를 설득한다.

알리타의 설득에 휴고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으나, 노바는 파이프링에 디펜스링(파이프를 기어오르는 자들을 죽이기 위한 믹서기 날같은 원형 금속)을 내려보낸다.

알리타는 그것을 뛰어넘어 피했으나, 휴고는 제대로 피하지 못해, 한 팔과 두 다리가 잘려나간다.

재빨리 떨어지는 그를 붙잡았으나, 휴고의 남은 팔마저 끊어지며, 그는 결국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분노한 알리타는 자렘을 파괴하기 위해 마음을 먹으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 후기 : 휴고는 사실 죽지 않았다?

휴고는 작게 보면 총 3차례의 죽음 위기를 맞게 된다.

첫번째는 자팡의 칼에 찔렸을 때, 두번째는 디펜스링이 내려왔을 때, 세번째는 알리타가 떨어지는 휴고를 붙잡았을 때.

사실 스토리 전개상 휴고를 죽이려고 했다면, 애초에 자팡의 칼에 찔렸을 때 죽였어도 충분했다.

혹여 자렘에 대한 알리타의 직접적인 분노를 일으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길 바랐기에 사이보그화 시키고 자렘을 오르는 씬을 추가했다고 가정하면,

차라리 디펜스링이 내려왔을 때 애초에 피하지 못하고 갈려나가는 씬이 좀 더 처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휴고는 디펜스링마저 피하며(완전히 피하진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머리는 온전히 남겨진 채 땅으로 떨어지게 된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만큼 확실한 사망플래그도 없다고 하지 않은가?

휴고가 확실하게 죽었다는 씬도, 죽은 휴고의 남은 육체를 수습한 장면도 나오지 않았다.

휴고를 사이보그화 시킨 것도 분명 의도가 있을 터.

후속작에서 알리타의 조력자로 재등장할 것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알리타는 일본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였다.

결국 스토리라인은 원작을 따라갔을 것이고, 만약 휴고가 살아있다면 '나무위키'에 그 내용이 언급되어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보았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결국 그냥 알리타의 희망고문, 분조자극용 캐릭터로 굴려지다가 안타깝게 죽은 셈...

물론 원작과 영화는 스토리를 100% 같게 하긴 어렵기 때문에 후속작에서 등장할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순 없긴 하다.

(어벤져스와 토르의 로키처럼)

알리타는 플롯이 탄탄한 영화는 아니다.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짧고 제한된 분량 안에 긴 서사를 모두 넣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에 결국 플롯이 망가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원체 서양액션영화 중 플롯이 뛰어난 영화는 보기 드물기 때문에... 애초에 플롯에 대한 기대는 전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 영화를 상당히 재밌게 보았다. 영화 자체에 대한 몰입도가 상당히 높았다.

화려한 액션과 그래픽 때문만은 아니다. 소재나 캐릭터들에 대한 매력이, '아바타'의 그것보다 훨씬 긍정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서사나 플롯의 탄탄함에 목을 매는 사람이 아니라면, 제법 재미있게 영화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글 = 김지금

사진 = 네이버영화 '알리타'

2014년 1월, 겨울왕국1이 개봉한 이후 약 6년만에 겨울왕국2가 개봉했다. 무서운 속도로 흥행을 이끌어가고 있는 겨울왕국2.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그 당시엔 사방에 '렛잇고~ 렛잇고~' 하며 울려퍼졌었다. 당시 군대에 있었던 나도 겨울왕국 ost의 인기를 실감할 정도였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와 같은 ost 돌풍이 일어나지 않는다.

겨울왕국2의 인기가 1보다 못하다면 모르겠다. 겨울왕국1은 초기 흥행이 뛰어나진 않았다. 렛잇고 열풍을 타고 점차 흥행이 강해진 케이스였다. 반면 겨울왕국2는 겨울왕국1이 6년간 쌓아왔던 인기와 인지도를 등에 엎고 시작부터 폭발적이 관객수 증가 추이를 보이고 있다.

누적 관객수 추이만 비교해봐도 그렇다. 겨울왕국1은 초기 8일동안 173만밖에 달성하지 못했으며, 개봉 46일만에 천만 관객을 달성했다. 반면 같은 기간. 겨울왕국2는 600만명을 달성했으며, 11일만에 858만명을 달성하였다. 겨울왕국1의 기록을 갈아치우는 건 시간 문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영화들의 특징은 뮤지컬처럼 등장인물이 중간중간 노래를 부르며 캐릭터의 심경을 표현해준다는 것이다. 덕분에 좋은 ost와 캐릭터의 스토리가 더해져 관객으로 하여금 감동과 전율을 전사할 때가 많다. Let it go에서 엘사가 얼음성을 세우는 장면, Speechless에서 자스민 공주가 휙 뒤돌아 성큼성큼 걷는 장면 등을 보면 소름이 돋곤 했다.

겨울왕국2의 ost가 나쁜 것도 아니다. 'Into the unknown', 'Show yourself' 등의 곡들이 음원차트 상위권에 올라있다. 영화 속에선 아름다운 영상미와 어우러지며, 이전 작품들과 같이 전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 세게에서 'Let it go'나 'Speechless'에 비하면 체감 인기는 크게 떨어진다.

그래서 오늘은 '겨울왕국2 OST가 Let it go나 Speechless에 비해 흥행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 복잡해진 플롯으로 인한 캐릭터 공감 부족

겨울왕국2가 개봉한지 만으로 6년 가까이 지난 지금, 겨울왕국1을 봤던 사람들의 연령대는 한층 치솟았다. 초등학생은 중, 고등학생이 되었으며, 고등학생은 대학생 혹은 직장인이 되었을 시기. 평균 시청 연령대가 높아지는 만큼,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의 타깃을 '아동'에서 '성인'으로 돌렸다.

겨울왕국2의 핵심 키워드는 '길'이었다. 작품 중간중간 계속 '길'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헤매는 엘사와 안나의 모험은 인간의 가장 최종 욕구인 '자아실현의 욕구'와 관련이 있다. 이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욕구로, 어린아이 보다 성인들이 더 공감할 수 있는 소재이다.

덕분에 스토리는 겨울왕국1보다 더 어둡고, 복잡해졌고, 심도깊어졌다. 힘을 억제하기 싫어 세상과 단절하여 '해방'되는 렛잇고나 자신의 나약함에도 힘에 굴복하지 않고 이겨내겠다는 '극복'의 스피치리스 처럼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Speechless에서 나오미 스콧이 휙 뒤돌며 노래를 부르는 부분은 아직까지 소름이 돋는다.

엘사 캐릭터의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복잡한 감정이므로, 관객들 전부가 엘사에 깊게 몰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엘사가 왜 정체성이 흔들리는지, 왜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지는 엘사의 감정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혹자는 '그냥 안나랑 행복하게 살면 되는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엘사의 감정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해방'이나 '극복'에서 오는 '시원함, 후련함' 등과 비교하면, 엘사의 감정은 훨씬 고차원적인 감정이다. 간접적인 경험(영화 시청)만으로 엘사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건 보다 불리하다.

자연히 OST에 대한 감정이입은 전작에 비해 부족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을 수 밖에 없다.

2. 뮤지컬 형식 음악이 되어 복잡하고 따라 부르기 어려움

캐릭터의 감정이 복잡해진 만큼, 감정을 묘사하는 OST 역시 복잡해졌다. 밝고 경쾌하며 간단한 멜로디로 구성되었던 'Let it go'에 비해 'Into the unknown'은 어둡고, 몽환적인 이미지와 가사로 이루어져있으며, 가사 역시 많아졌다.

가장 큰 차이는 노래의 핵심이자 인기를 끄는데 가장 중요한 '훅' 부분을 보면 비교 가능하다.

Let it go, let it go Can't hold it back anymore Let it go, let it go Turn away and slam the door I don't care what they're going to say Let the storm rage on The cold never bothered me anyway

Let it go의 훅 부분

I won't be silenced

You can't keep me quiet

Won't tremble when you try it

All I know is I won't go speechless

Speechless

Speechless의 훅 부분

Let it go나 Speechless의 훅을 보면, 꽤 많고 쉬운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렛잇고~ 한번 부르다 보면 뒤의 캔 홀미 백 애니 몰~ 하며 줄줄이 이어서 부르기 좋게 되어있다.

스피치리스도 아이원비 사일런슫~ 유켄 킵미 콰이엇~ 하며 줄줄이 흥얼거리게 된다.

영화 한번만 봐도 전체적인 멜로디가 어느정도 기억이 난다.

Into the unknown

Into the unknown

Into the unknown

Ah ah oh oh

Ah ah oh oh oh oh

Into the unknown의 훅 부분

반면 Into the unknown은 훅이 매우 간결하여, 인투디언노운~ 아아아아~ 밖에 흥얼거릴 수 없다. 곡을 여러번 반복해서 듣지 않는 이상, 벌스나 브릿지 부분은 기억이 잘 안난다.

렛잇고나 스피치리스는 흥얼거리기 좋은 만큼, 노래 난이도가 높은 편이 아니기에 노래방에서 부르기도 좋다. 반면 Into the unknown을 노래방에서 불러본다고 생각해보자. 음...

노래 잘하는 사람이 부르는 건 듣기 좋지만, 평범한 일반인이 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면? 아마도 듣기 좋은 소리는 안날 것 같다.

따라부르기 힘든 노래는 곧 바이럴성이 낮다는 걸 의미한다. 즉 음악 흥행에 훨씬 불리하다.

히트쳤던 아이돌의 노래들을 보면 대부분 중독성 강한 멜로디에 따라 부르기 좋고 쉬운 가사과 안무 들로 구성되어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음악이 흥행에 유리하다.


겨울왕국2는 깊어진 스토리와 캐릭터 감정선으로, 겨울왕국1을 뛰어넘었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겨울왕국2를 재미있게 보았고, 중간중간 소름도 느꼈지만 겨울왕국1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단순했던 스토리가 다소 무거워지고 복잡해졌다 해서 더 나은 작품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겨울왕국2 보다 더 무겁고, 심도 깊은 작품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전작을 뛰어넘었다고 평가받는 건, 전작이 워낙 단순한 스토리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반전 매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오함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 높지 않은 디즈니였기에, 살짝 심오함을 건드려주니 고평가가 나올 수 있었던 것.

디즈니 작품들은 '단순한 스토리'에서 오는 '감정'과 그로 인한 '메세지'가 매력적이었다.

'겨울왕국2'로 그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성공적으로 이미지 변신을 한 것 역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그러나 단순히 플롯이 더 깊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겨울왕국2'가 '겨울왕국1'을 뛰어넘었다고 하기엔 부족하다는 거다.

단순한 작품이라고 해서 심오한 작품 보다 뒤떨어지는 건 아니다. 서로의 방향이 다를 뿐.

'겨울왕국2'는 '겨울왕국1'과는 '다른 성격'의 작품이기에 절대적으로 1이 뛰어나다, 2가 뛰어나다 평하는 건 올바르지 않다.

개인적으로, '겨울왕국2'가 더 인상깊었다고 평하거나, 지금까지 행보와는 다른 형태의 작품을 내놓은 디즈니의 새로운 변신을 응원하고 기대하는 정도가 가장 적당한 스탠스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글 · 김지금

사진 · 네이버영화 '겨울왕국' , '겨울왕국2'. '알라딘'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원치 않으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


마션 줄거리

NASA의 화성 탐사대는 화성을 탐사하던 도중 모래폭풍을 만난다.
강한 모래 폭풍 때문에 지구로 돌아가는 우주선이 쓰러질 위기에 놓이자, 탈출을 하기로 결정한다.

우주선에 탑승려는 도중, 주인공 '마크 와트니'는 모래폭풍에 의해 날아온 '부러진 통신 안테나' 파편에 맞아 날아가게 되고, 그를 찾을 수 없던 대원들은 시간을 더 지체하면 화성에서 탈출 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와트니를 두고 간다.

모래 폭풍에 날아간 데다 혼자 화성에 남겨진 와트니는 탐사팀 및 지구인들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임무 도중 사망하게 된 와트니에 대해 크게 안타까워했다.

 

화성에 홀로 남겨진 와트니

하지만 와트니는 살아 있었다.
그에겐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구조대를 기다리며 생존을 이어나가는 것과 그냥 포기하는 것.
그는 구조대를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식물공학자였던 그는, 그가 가진 지식과 남겨진 감자들을 이용해 화성에서 식물을 재배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화학적으로 물까지 만들어낸 그는, 구조대가 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생존 사이클을 만들어냈다.

​한편 지구에서는 위성 사진을 통해 와트니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를 구출하기로 결정한다.
세계는 죽은 줄 알았던 화성 탐사대원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며, 그 악명 높은 중국마저 와트니를 위해 숨겨두었던 우주선 기술을 공개하며 미국을 돕는다.

한편 와트니는 구조대를 기다리며 생존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두가지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기지 내부를 화성의 대기에서 막아주는 '에어락' 연결부가 수명을 다해 파열되고 만 것이다.
기압차로 인해 기지 한쪽이 아예 폭발해버리고, 와트니가 기껏 키운 감자들이 다 죽어버렸다.
구조대가 도착할 때 까지 버틸 수 있을만한 식량이 없는 상황.

죽어버린 감자들

결국 식량 조달을 위해 안전 점검을 생략하고 구조선을 발사하지만, 공중에서 폭파하고 만다.

​그때 와트니를 두고 떠났던 화성 탐사대원들이 타고 있는 우주선을 이용해 구조를 시도한다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지구의 자전력을 이용해 우주선을 다시 화성으로 보낸다.

하지만 그 우주선은 화성에 착륙할 수가 없다. 와트니가 직접 화성상승선을 타고 우주선 근처까지 도착해 도킹해야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고, 와트니는 자신의 슈트를 찢어 기압차로 추진력을 얻어 '아이언맨' 처럼 날아 우주선 탑승에 성공한다.

구조된 와트니는 추후 NASA의 훈련 교관이 되어, 학생들에게 자신의 화성 생존 썰을 푼다.
질문이 있냐며 물어보자 모든 학생이 손을 번쩍 들며 영화는 끝이 난다.

 

 

마션 리뷰, 생명 무게의 아이러니

와트니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

우리는 어려서부터 '생명의 무게는 모두 같다' 라는 걸 배운다.
대표적 일화는 성명의 저울이다. 다양하게 변형되어 있지만 내가 기억한 일화는 아래와 같다.

한 사냥꾼이 비둘기를 사냥했다.
그러나 그 비둘기는 어느 귀족이 기르고 있는 비둘기였다.
사냥꾼은 사죄를 했고, 귀족은 그럼 비둘기의 무게 만큼 살을 내놓으면 용서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곤 저울을 가져왔다.
사냥꾼은 자신의 살 한 덩이를 베어 저울에 올렸다. 그러나 저울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더 잘라서 올렸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냥꾼은 자신의 팔 한쪽을 잘라 올렸다.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사냥꾼은 스스로 저울 위에 올랐다. 그제야 저울은 수평이 맞춰졌다.

동물과 인간의 생명 무게도 동일하다고 배우는데, 하물며 인간과 인간 간의 생명의 무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도 과연 그럴까?

마션의 주인공은 화성 탐사에 나설 만큼 나사 안에서도 엘리트로 꼽힐 것이다. 또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존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천문학적은 금액을 써가면서 구조 작전을 세운다.

그러나 세상엔 와트니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고, 도움은 커녕 신경도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똑같은 생명의 무게라면, 왜 와트니 한사람은 전세계가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도와주지 않는걸까?

당연히 생명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생명체지만, 그보다 더 감정적이다.
인간에게 감정이 있는 이유는 분명 생존에 필수적인 장치이기 때문일거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감정이 없는 사람들이 적자생존하여, 현재는 이성만 남은 사람들이 있겠지.

감정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게 도와주고, 강자가 약자를 돕게 해준다. 물론 감정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는 악조건도 있지만.

아무튼 인간은 감정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생명의 무게를 비교한다. 나와 가까운 사람은 무겁고, 나와 먼 사람은 가볍게. 모르는 타인 수백만명의 죽음엔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지만 가까운 사람 한 명의 죽음엔 억장이 무너지는게 사람이다.

와트니의 경우에도 화성에 홀로 남겨진 탐사원이라는 그럴듯한 스토리라인이 그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세계가 그를 돕게 만든, 즉 그의 생명의 무게를 늘리게 되었다.

생명의 무게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의 무게는 같다고 배운다.
생명 무게의 아이러니다.



글 · 김지금
사진 · 네이버영화 '마션'

베놈 줄거리
[ 도입 ; 지구로 데려온 4마리의 심비오트 ]

초 거대기업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대표 '칼튼 드레이크'는 외계 생명체와 인간의 결합을 통해 좀 더 완벽한 인간, 그러니까 우주의 극악한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는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새로운 자원을 발견하길 바란다. 지구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우주는 너무나도 두려운 곳이고,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도 버거운 환경이다. 그가 보다 완벽한 인간을 탐구하는 이유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생체실험, 임상실험을 아무렇지 않게 진행한다. 전형적인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 우주탐사 사건도 그랬다. 외계생명체 '심비오트'를 지구로 가져오는 도중 사고로 인해 우주선에 탑승한 사람들이 죽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사회적으로 은폐 되었고, 정의를 추구하는 기자 '에디 브룩'은 이 사건을 파헤치려다 드레이크에게 찍혀 하루아침에 집과 여자친구, 직장까지 모조리 잃고 말았다.

새로 직업을 구해보려 하지만, 식당 설거지일마저 구해지지 않고. 결국 돈만 축내며 살던 그의 곁에 한 여자가 찾아온다. 그녀의 정체는 '라이프 파운데이션' 연구원인 '도라 스카스'. 에디 브룩에게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비밀을 제보하기 위함이었다.

과연 어떤 내용이었을까?

[ 발단 ;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생체실험]

'라이프 파운데이션'은 우주에서 외계 생명체 '심비오트' 4마리를 생포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우주선이 추락하는 바람에 한 마리의 심비오트는 탈출하고, 3마리만 실험실로 오게 됐다.

드레이크는 실험을 위해서 노숙자들을 데리고 마구잡이로 생체실험을 감행했고, 실험에 실패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이에 도라 스카스는 양심에 가책을 느껴 에디 브룩을 찾아온 것이다.

에디 브룩은 고심 끝에 그 제안을 받아들여, 라이프 파운데이션 건물에 몰래 들어가 취재를 시작한다. 그러던 도중 안면이 있는 노숙자를 구해주려다 심비오트의 숙주가 되고 만다. 그 심비오트의 이름이 바로 '베놈'.

도라는 에디 브룩에게 이 사실을 폭로했다는 죄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고 만다. 결과는 도라도 죽고, 심비오트도 죽게 되었다.

한편 탈출한 심비오트는 소녀의 몸에 기생하여 드레이크를 찾아왔다. 그리고 드레이크 몸으로 옮겨간다. 이렇게 에디 브룩과 드레이크의 2차 대립의 서막이 열린다.

[ 정리 ; 심비오트 4마리의 행방은? ]

A : 에디 브룩이 실험실에 몰래 잠입하면서 봤던 데이터를 통해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B : 도라의 몸에 들어갔다가 도라가 죽으며 함께 죽었다.
C : 베놈. 에디 브룩의 몸에 기생했다. 
D : 라이엇. 탈출했던 심비오트. 드레이크의 몸에 기생한다.

[ 결말 ; 지구가 좋아져버린 베놈]

심비오트들의 목적은 자신의 수백만 동족들을 지구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드레이크와 라이엇은 서로 목적이 같았기에 직접 우주선에 올라타 심비오트들을 데려오려 했다. 베놈 역시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지만, 에디 브룩의 영향인지 지구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에디 브룩과 베놈은 드레이크와 라이엇을 막아섰다. 하지만 대장급인 라이엇과 루저급인 베놈의 전투력 격차는 매우 컸다. 에디 브룩이 워낙 좋은 숙주였기에, 약간은 비빌 수 있었지만 결국 라이엇에게 패배하는 베놈.

라이엇과 드레이크는 결국 우주선에 올라타는 것을 성공하지만, 베놈이 출발하려는 우주선을 폭발시켜 결국 막아내고 만다.

베놈과 에디 브룩은 그렇게 지구를 지켜내며, 서로 공존을 위해 타협점을 찾아간다. 예를 들면, 착한 인간은 먹지 말고, 나쁜 인간만 먹는다든지.

[ 쿠키영상 ]

베놈과 에디 브룩은 한 교도소에서 연쇄살인마와 대화를 하게 된다. 연쇄살인마는 '내가 밖으로 나가면 대학살이 일어날 것이다.' 라며 차기작을 암시한다.
(새로운 심비오트의 등장이 아닐까 한다)

쿠키영상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등장하기 때문에 금방 볼 수 있다.



베놈 후기 - 액션은 굿, 개연성은 의문

본디 미국식 히어로물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베놈의 평도 워낙 나빴기에 기대는 전혀 하지 않고 갔다. 그런 나의 시각으론 은근히 '볼 만 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기들을 찾아보며 '베놈'이라는 안티 히어로 캐릭터를 너무 히어로 같이 표현했다며 실망하는 의견들이 많았다. 나는 기존에 마블의 팬이 아니기에 원작의 내용이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그냥 영화 '베놈'만 놓고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마블 세계관에 대해 큰 관심은 없었기에, 각 작품간의 연관성을 일부러 찾지도 않았다. 특별히 영화 해석을 요구하는 내용도 없었기에 분석적인 내용을 적기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간략하게 나의 느낀점을 적고자 한다.

첫째, 베놈이라는 캐릭터는 상당히 매력있었다. 적어도 원작의 베놈에 대한 설정을 모르는 내가 보기엔. 한 마디로 츤데레 캐릭터. 툴툴 거리면서 결국 숙주인 에디 브록의 안녕을 위해(사실 그게 본인의 안녕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힘을 보태준다. 결말부엔 약간 거칠지만 말까지 잘듣는 애완동물 같은 느낌도 들었다.

둘째, 액션씬은 좋았다. 지루한 감이 없었고, 스피디함과 타격감이 뛰어났다. 다만 베놈이 인간을 먹어치우는 과정은 심의 때문에 삭제돼서 그런지 상당히 밋밋했다.

셋째, 개연성은 너무 엉망이다. 베놈이 지구 파괴에서 지구 지키미로 생각을 바꾼 이유에 대한 설명이나 과정이 전혀 없다. 사라진 30분 사이에 있었던 것일까? 

어쨌건 영화 내적으로만 생각하면, 미국 영화의 전형적인 억지 급전개였다. 몇몇 영화의 결말부에서, 힘들게 고난을 이겨낸 남주 여주가 갑자기 눈이 맞아 키스하면서 'I love you' 같은 대사를 내뱉는 듯한.

원작 팬이라면, 또 개연성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베놈에 높은 평점을 주긴 어려울 것이라 본다. 베놈을 재밌게 본 나 역시, 평점을 매기라면 높은 평점을 주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별 5개 만점에 3~3.5 정도?

하지만 개연성만 개판이었지, 뿌렸던 떡밥을 수거하는 건 훌륭했다. 킬링타임용, 주말 데이트용으론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적어도 영화가 재미없거나 지루하진 않았으니까.




글 · 김지금
사진 · 네이버영화 '베놈'



원작인 웹툰 <치즈 인더 트랩>이 인기를 끎에 따라
드라마 혹은 영화화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독자들의 소원대로 정말 이루어졌다.

한국 작품 중에서 드라마화와 영화화가 동시에 된
소설 혹은 만화가 몇이나 있을까?

그만큼 치즈 인더 트랩의 인기는 상당했다.
처음 드라마화가 확정이 되고, 배우들이 공개되었을 때
많은 이슈가 있었다.

유정은 사람들이 바라던 대로 박해진이 맡았지만,
홍설 역으론 많이 거론되던 '오연서' 등의 배우와는 달리
'김고은'이 캐스팅 되었다.

이 때문에 상당히 반발이 많았고,
캐스팅을 자기들 원하는대로만 해달라고 하는
치인트 악성 팬을 보고
치인트 + 시며느리를 조합한, '치며느리'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다.




결과적으론 최종 시청률 7%대로,
케이블 드라마 치곤 나쁘지 않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특히 서강준과 이성경은 각각
백인호, 백인하 캐릭터를 매력있게 소화해 내면서
주연보다 더 주목받을 만큼 임팩트가 있었다.

주연인 유정의  비중이 후반부 부터 백인호에게 밀려서
남주가 바뀐거 아니냐는 빈정거림도 많았다.

원작과는 다른 스토리 라인과 캐릭터 설정 때문에
원작 작가인 순끼님 자체도 불편한 의사를 내비치면서
불명예스럽게 드라마가 종영되고 말았다.

그런 드라마에 화가난 것인지,
배우부터 싱크로율 높게 캐스팅한
영화 치즈인더트랩 제작이 확정되었다.

싱크로율이 좋았던 유정역의 박해진은 그대로 하지만,
가장 말이 많았던 홍설역은 그토록 사람들이 원하던
오연서로 캐스팅 되었다.





약 2년 후, 영화 <치즈 인더 트랩>이 개봉을 했다.
재밌어보인다기 보단,
내가 봤던 웹툰과 드라마가 영화로는 어떻게 나왔을까
궁금한 마음에 보러간게 컸다.

확실히 영화는 드라마보다 캐릭터 싱크로율이 괜찮았다.
스토리라인이나 캐릭터 설정 등,
원작 느낌을 잘 살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캐릭터들의 높은 싱크로율은 영화 스토리에 몰입하는데
더욱 도움을 주었다.

기존에도 '로맨스릴러'라는 장르로 불렸던 치인트인데,
영화에서도 로맨스릴러의 모습을 여실없이 보여주었다.
아니, 웹툰보다 더욱 스릴러에 치중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원작을 본 사람들에게 서비스로 제공하는
영상물 느낌이었다.

긴 호흡의 웹툰을 2시간짜리 영화로 만드느라
스토리가 싹뚝싹뚝 잘려나가는 것은 물론,
커다란 한 줄기의 메인 플롯이 존재하지 않고,
여러개의 서브 플롯이 난잡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기승전결이 아닌, 기승승승결 같은 느낌이었다.
백인호, 백인하 캐릭터는 원작 캐릭터의 성격을 잘 살렸으나,
도대체 왜 등장해야하는지 모를 지경.

떡밥은 잔뜩 뿌려놓고 영화 내부에선 회수되지도 않았다.
악역도 아니고, 선역도 아니고...
음식으로 치자면, 밥도 아니고 반찬도 아니고 조미료도 아닌,
그냥 데코레이션 같은 느낌이었다.

떡밥은 잔뜩 뿌려놓고,
회수는 웹툰을 본 우리들 기억에 의존한다.

이들이 존재함으로써 영화의 재미를 증가시키는 것은 맞지만,
플롯상 등장해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원작에 있는 캐릭터니까 영화에도 넣어야지. 하는 느낌.

등장 시간은 조연이나, 비중은 엑스트라 급이었다.
결국 전체적인 영화의 평은 드라마보다 못한 듯 하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웹툰과 드라마, 영화가 가지는 특성이 모두 다르기 때문일거다.
호흡도 다르고, 연출방법도 다르고, 소비 연령층도 모두 다르다.

웹툰은 분량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전체적인 분량을 작가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
영화는 물론 드라마보다 스토리가 길다.

그나마 드라마는 여러 화에 걸쳐서 찍을 수라도 있지,
영화는 2시간 이내의 러닝타임 내로 압축을 해야한다.

웹툰은 등장인물의 표정, 대사, 독백, 부연설명 등
상당히 폭넓게 묘사가 가능하지만,
영화나 드라마는 시각적인 부분을 위주로 묘사를
해야만 한다는 한계점도 갖고 있다.

주 소비층 역시, 웹툰은 10대에서 30대,
드라마는 30~40대 여성이,
영화는 20대들이 가장 많이 본다.

같은 작품이라도,
웹툰 소비층과 영화 소비층은
평가를 다르게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원작 웹툰을 드라마나 영화로
리메이크를 할 때 고려해야할 사항은 무엇일까?

각 매체의 특성에 맞게 스토리를 재구성해야한다.
매체에 맞게 묘사를 다시하고,
매체에 맞게 플롯을 바꿔야 한다.

웹툰에서 매력적인 캐릭터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매력적이게 보이기엔 쉽지 않다.

웹툰 홍설처럼, 외부로 보여지는 것 보다
내적 갈등과 많은 생각으로 복잡한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드라마나 영화에선 매력적으로 보여지기 힘들다.

그럼 홍설이라는 캐릭터도 드라마나 영화에 맞게
수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수정을 거치면 사람들은
왜 원작을 따라가지 않냐고 엄청난 비난을 쏟아낸다.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이 이런 경우였다.
웹툰 원작 스토리를 드라마라는 특성에 맞게
잘 각색해서 제작했지만,

많은 치인트 팬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작품이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 것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그렇다고 영화처럼 원작을 충실히 반영해서 제작을 해도,
웹툰과는 다른 특성 때문에 여기저기 숭텅숭텅 스토리가 잘리고,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비판을 한다.

많은 수의 웹툰 원작들이 드라마나 영화가 되곤 했지만,
대다수는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비판의 큰 줄기는 두개가 있다.

첫번째는 '중요한 부분을 너무 짤라 먹었다.'
이는 원작에 출실하여 만든 작품들을 대상으로
나오는 비판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웹툰과 드라마나 영화는
스토리 길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자연히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제외하고 촬영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감독'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사실 작품 내에서 중요하지 않은 장면은 없다.

자신이 재밌게 본 부분은 중요하다,
재밌지 않게 봤거나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
라고 표현할 뿐이다.

하지만 그 기준은 철저히 개인적 취향이기 때문에
원작의 모든 씬을 그대로 제작하지 않는 한,
이런 비판은 끊이지 않고 등장할 수 밖에 없다.


두번째는 '원작의 느낌을 살리지 못했다.'
영화나 드라마라는 매체의 특성에 맞게 각색하여
제작한 경우이다.

감독과 작가들은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면
이상하고, 완성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매체의 특성에 맞게 리메이크를 하였다.

하지만 이런 점은 원작 팬들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고,
이는 작품 자체의 매력과 완성도는 관계없이
근거없는 비난을 받게 된다.

감독과 작가는 오히려 훌륭하게 작품을 재탄생
시켰는데도 말이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중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는
'미생'이 아닐까 한다.

칭찬일색이던 미생.
왜 미생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건 바로 미생이라는 웹툰이
"대중적으로 유명한 웹툰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나오기 전까지,
미생이라는 웹툰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던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미생 역시 드라마라는 매체에 맞게 각색된 작품이다.
하지만 미생을 보는 시청자들 대다수가, 미생 원작을
보지 않았다.

그러니 원작과 다르다고 비판을 하는 사람이 적어,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낸 것이다.
(찾아보면 미생도 웹툰과 다르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찾아볼 수 있다.
워낙 미생 웹툰 구독자 수가 다른 유명 웹툰에 비해
많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용히 뭍힐 수 있었다.)

상당수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영화는
인기있는 웹툰만을 원작으로 하기에,
원작의 그늘에 가려져 비교되기 쉽상이다.

드라마는 드라마 독립적으로,
영화는 영화 독립적으로 봐야한다.

원작 웹툰과 비교하기 시작하게 되면,
그 어떤 작품도 호평을 받기 힘들 것이다.

제발 원작에 충실하라고 발끈하지말고,
웹툰으로만 남았어야 했다고 통찰력을 가진 척 하지 말고
작품은 작품 그 자체만으로 보자.

그런식의 관점은 웹툰의 드라마화, 영화화의 발전을
저해할 뿐이다.
어떻게 만들어도 원작을 기준으로 평가하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진실은 없다믿음만 있을 뿐.

영화 <마더>



아무도 믿지 마나도 믿지 마.’ 작품에서 진태가 도준의 어머니에게 말하는 대사다.


필자는 이 대사가 이 영화의 핵심 주제를 꿰뚫는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외부적 이야기만 놓고 보자면도준은 살인 혐의를 뒤집어쓰게 됐고,

그 누명을 벗기기 위해 엄마는 무능력한 공권력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발로 뛰었으며,

범인일 거라고 생각되는 할아버지에게 찾아갔으나그 할아버지는 도준이 범인이라고 말하고,

아들의 범죄를 덮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진범이 잡혀서 도준이 풀려나는 이야기.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 해석들이 많이 존재할 수 있다.




아무래도 <마더>를 보고 가장 많이 이야기 거리가 되는 게누가 진짜 범인이냐는 것이다.


첫 째로영화 내에서 진범으로 밝혀진 종팔이가 범인인 경우.


정말 단순하게영화를 생각 없이 봤을 경우의 경우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다지 말할 것은 없다.


두 번째는 바로 도준이다.


도준은 바보라고 불렀을 때평소엔 보이지 않던 폭력성을 드러낸 장면들이 여러 번 나온다.


이성을 잃고 상대방에게 달려들곤 했는데고물상 노인의 증언에서나,

마지막 장면에 높은 곳에 시체를 올려놓은 이유를 정확히 짚었다는 점에서 도준이 진짜 범인이고,

종팔이는 억울하게 잡혀 들어간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셋째는 고물상 노인이 범인이라는 것이다.


고물상 노인의 목격 증언은 100% 진실이 아니었다.


아정에게 쌀을 주는 대신 관계를 가지기 위해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작품 내 여러 장면 등에서 추측이 가능한데,

노인은 아정을 안다고 하지도 않고그 자리에 있었던 이유도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미 잡혀 들어가서 옥살이를 하고 있는 도준을 재차 신고하겠다고 그 자리에서 경찰서에 전화를 한다.


물론 엄마가 노인에게 도준이 금방 풀려날 것이다라는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이 점은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이외에도 다른 해석들이 있을 수 있지만이 세 가지가 그나마 텍스트 내부에서 근거 있게 추측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해석글을 하나 보았다.


두 번째 경우에서 좀 더 깊게 들어간 건데모든 일들이 도준의 계획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작품 내부에서 어머니가 도준을 5살 때 죽이려고 했다는 장면.


그러니까 그 이후 도준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엄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모든 일을 꾸몄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근거로영화 후반부에는 도준의 바보 같았던 행동이 상당히 달라졌다, 5살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진범에게 뭍은 피는 아정의 코피였을 것이다등을 들고 있다.


만약 이렇게 해석한다면 감독은 작품 내에서 등장인물들만 속인 것이 아니라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까지 속인 것이다.


이 리뷰를 본 필자는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사실 그 리뷰를 보기 전까지는 영화가 춤으로 시작돼춤으로 끝나기에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했지만이 리뷰가 나의 생각을 뒤집어 버렸다.


그만큼 기존 사람들이 하지 못한 파격적인 해석이었다고 생각한다.



맨 처음 언급했던 대사.


그것을 바꿔보면 영화 장면 그 어느 것도 믿지 마.’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저 대사는 영화를 보는 우리 관객에게 하는 소리는 아니었을까?




*해당 리뷰는 비평문, '결국 최종 승리자는 괴물이다'를 보고, 그에 대해 쓴 것입니다.*


최종 승리자는 괴물이다

그래서 시퀀스인가괴물인가?



억지스러운 구멍가게 시퀀스왜 필요했던 것일까?

 

추격자는 관객이 500만명이 넘은 영화이다이 숫자는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음을 방증하는데무엇이 그걸 가능케 했을까이미 많은 평자들은 추격자의 장점에 대해 지적했다하지만 무언가 말해지지 않은 단점이 있다그리고 그 단점은 단순히 영화의 흠이 아니라영화의 본론과 직결된 것이 담겨 있다영화 추격자에는 몇 가지의 우연과 무리한 설정(시퀀스)가 있다개미슈퍼 부분이 그것이다그래도 이 장면은 스릴러의 속도감을 위한 대가 정도로 여기고 넘어갈 수 있다문제는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부분바로 그 다음 장면이다지영민은 가게 주인과 미진을 죽인 뒤미진의 시체를 들고 집으로 갔다과연 이게 가능한 일일까그렇다면 왜 그런 우연과 작위를 짊어지고라도 해당 시퀀스가 필요했을까관객의 입장에서는 왜 그 무리한 시퀀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을까이러한 의문을 던져놓고 영화 <추격자>를 바라본다이를 답하기 위해 다른 점들을 먼저 짚고 넘어가보자.



미진과 현서게임에 배팅된 제물?

 

해당 시퀀스의 결말은 바로 미진의 죽음이다미진은 꼭 그렇게 죽임을 당하고전시가 되어야 했을까감독은 이미 미진이 죽는 다는 구상을 통해 결말을 정해놓고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하지만 혹시 그녀가 죽은 게 아니라오히려 그녀의 죽음이 우리가 말하지 않은 마음속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이와 비교할 만한 영화가 하나 있다바로 <괴물>이다주인공인 강두의 딸현서는 꼭 죽어야 했는가하는 의문을 똑같이 던져볼 수 있다봉준호 감독 역시 현서의 죽음에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미진과 현서의 죽음 같은 비극적 엔딩이 한국에서는 관객에게 위로를 주며오히려 상업적 감각처럼 받아들여지는 측면도 있던 것 같다는 봉준호 감독의 말로는 현서와 미진의 죽음을 다 담을 수 없다.

두 영화를 하나의 게임으로 본 다면, <괴물>에서는 현서의 목숨을 두고, <추격자>에서는 미진의 목숨을 두고 벌어진 시합이라고 볼 수 있다양 측에서 하나의 존재를 사이에 두고 대결하는 구도를 보면 말이다그렇다면 현서와 미진의 목숨은 이 게임에 베팅된 제물이라고 볼 수 있다그렇다면 왜 죽어야 했는가?’라는 물음은 왜 그들이 게임의 제물로 선택되었는가?’ 라는 질문으로 치환되어야 한다고 (비평문)글쓴이는 말하고 있다그리고 빙빙 돌아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내놓은 결론은 굉장히 간단하다바로 미진은 온갖 위험과 병이 들었다 할지라도 부름에 거절 할 방법은 없었다는 것그리고 <괴물>에서 매일 한강변 노점으로 와야 하는 현서는 한강에 괴물이 나타났을 때 가장 잡아먹히기 쉬운 하층민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다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라면 왜 중간에 괴물의 승리양상을 집어넣어 복잡하게 구성 했던 것일까결론을 뒤에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던 것일까그리고 정말 저렇게 단순한 이유뿐이었을까아니면 황순원의 소나기 난 보랏빛이 좋아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었음에도 관객의 입장에서 괜한 의미부여를 한 것일까?



그들은 왜 죽어야 했는가? vs 왜 그들이 제물이었는가?

 

여기서 필자의 첫 번째 의문이 발생한다. (비평문)글쓴이는 그에 대한 근거로 현서와 미진이 왜 죽었는가라고 질문하는 순간 그 질문의 휴머니즘적 뉘앙스에 이끌려 우리가 무조건 강두와 중호의 편에 서 있다고 오인하기 쉬우며 동시에 이 영화에서 얻은 감각적 쾌락을 그 질문의 윤리성으로 은폐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라고 말한다. ‘왜 죽어야만 했는가?’ 는 괴물의 편도강두 및 중호의 편도 아닌 중립적인 입장에서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닐까과학 시간에 지구는 왜 자전하나요?’와 같은 질문처럼 순수하게 그 이유를 물어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목표를 향해 달려갔는데가다 보니까, ‘이게 아니네?’ 하고 다시 되돌아 간 듯 한 느낌이 들었다만약 그런 거라면 굳이 왜 앞에서 왜 죽어야만 했는가?’라고 거창하게 문제제기를 했을까그냥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더 깔끔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웅과 애완동물?

 

두 번째 의문으로는 (비평문)글쓴이는 한강변에서 마주한 아이의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괴물은 영웅 혹은 애완동물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그에 대한 근거로 한강변에서 우리가 괴물에게 쫓긴 적 없고한 편의 영화일 뿐이고게다가 디지털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사람들은 괴물을 만나러 <괴물>을 보러 갔다고 말한다하지만 만나러 갔다능동적으로 찾았다고 해서 그것이 영웅이나 혹은 애완동물이라는 표현은 너무나도 지나친 표현 아닐까영웅의 사전적 정의는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네이버 국어사전)’이라고 되어있다애완동물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동물을 뜻한다그런데 괴물이 그런가단지 한강변에서 괴물을 찾는다고괴물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아 갔다고 괴물이 영웅 혹은 애완동물이라는 표현은 다소 잘못된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괴물>의 괴물승리양상

 

<괴물>의 괴물은 지영민과는 달리 단순히 생존이 목표이다생존을 위해 한강을 습격하고인간들을 공격해 잡아먹었다사자가 사슴을 사냥하듯 말이다상위 포식자가 하위 포식자를 사냥하는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강두의 입장에서야 현서를 놓고 벌이는 시합이었지만괴물에게는 그냥 먹이 하나 뺏기느냐 마느냐의 싸움이었던 것이다그러한 싸움에서 괴물은 자신의 최고 목적인 생명을 잃었다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 났다면 양자가 모두 패배한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하지만 괴물의 탄생 원인을 잊어서는 안 된다미군이 몰래 하수구로 방류한 포름알데히드가 그에 대한 원인이었다강두네 가족은 포름알데히드를 불법 방류한 미군과 싸우는 것이 아닌그로 인해 나타난 결과물과 싸웠을 뿐이다사건은 해결된 것이 아니라 0의 상태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미제 괴물은 텍스트 내외적으로 매우 강력한 힘과 불멸을 상징하고 있다결국 괴물은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었다.



<추격자괴물의 승리양상

 

<추격자>의 괴물은 연쇄살인마다게다가 성불구자이며하층민이다현대 사회에서 남성의 능력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남성그 자체로서의 능력그리고 경제력하지만 지영민은 성불구자에하층민이다이것을 계급으로 치차면 제일 최하층일 것이다그의 계급적 성적 처지를 연쇄살인의 유일한 동기로 내세우는 것은 사실 납득하기 힘들다반대로 계급적 성적 처지를 외면하고 그는 전혀 알 수 없는 인물이라고 말해버리는 것 역시 납득하기 힘들다하지만 적어도 방류된 독극물이 괴물을 만들어낼 확률 보다는 지영민의 경우가 더 높음에도 나홍진 감독은 영화 밖에서 둘 사이의 연관은 절대 없다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추격자>에서의 성적 경제적 상황과 살인마의 관계는 <괴물>에서의 미군의 독극물과 괴물의 관계와 비슷한 점이 있다후자가 전자의 결과는 아니다하지만 전자의 징후로 인해 태어났으며후자와 싸워 이겨도 전자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지영민은 <괴물>의 괴물과는 달리생존이 목적이 아니다연쇄살인을 통해서 무언가 이루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그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영화는 그가 이루려는 것을 징후적으로 드러냈다그것은 그가 예술가라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그것도 종교 예술가 말이다영화 내내 지영민과 종교적 기표들은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하지만 주목해야할 것은 지영민이 십자가를 향해’ 범죄를 저지른다는 사실이다교회 집사 가족을 살해하여 그의 집을 살인의 거처로 삼았고창녀들의 머리에 정을 박아 죽였다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행위를 흉내 내고 있다.

 



살인의 예술화를 위한 시퀀스

 

앞서 말했던 것으로 구멍가게의 시퀀스에 대해 정리를 해보자이 시퀀스가 왜 필요했을까? <괴물>의 우연들은 무능력한 강두 가족을 위해 마련되었고결국 그 우연들에 힘입어 괴물을 죽였다반면 <추격자>의 우연과 작위들은 지영민이라는 괴물을 위해 마련됐다지영민이 미진을 살해한 뒤그녀의 머리와 손을 어항에 넣고 감상한다분명히 이야기 전개상으로만 보면 불필요한 장면임이 분명하다하지만 이 장면은 살인 자체가 아니라 살인을 예술화 하는 것이 지영민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따라서 그 우연과 작위들은 이 순간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결국 문제는 관객이 이를 승인하고 넘어가느냐그러지 않으냐 인데많은 평자들과 관객들은 그것을 승인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지적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최종 승리자는 괴물이다

 

지영민을 낳은 저 거대 도시의 질서도독극물을 방류하는 미군도 고스란히 남아있다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그들은 괴물을 처치했지만결국 제 2, 3의 괴물들은 다시 나타날 것이다그들이 등장하더라도 또 다른 현서와 미진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그들이 죽음으로써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반면두 괴물은 승리했다.

 



가난하고 무력한 부성?

 

결국 게임에서 패배했다는 것그리고 <괴물>의 경우우연을 통해서 괴물을 죽였다는 것으로 그들을 가난하고 무력한 부성이라고 표현한다하지만 그들은 결국 그들의 힘으로 괴물을 잡았다물론 그게 원천적인 해결이 될 수는 없었지만직접적인 대상에게는 복수한 셈이다그것을 가난하고 무력한 부성이라고 비하할 수 있을까?

 



글의 흐름을 굳이 이렇게 했어야 했나?

 

역시 이런 이야기를 할 거면 중간의 이야기는 너무 불필요하게 돌려 말하지 않았나 싶다굳이 사이에 현서와 미진이 왜 죽어야 했는지두 괴물의 승리양상을 설명해야 됐는지 의문스럽다사실 두 개의 주제가 따로 논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저 사이를 싹 다 지워버리고 초반부와 후반부만 남겨둬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아니오히려 더 간결해서 납득이 잘 갈 수도 있겠다비평문 전체의 흐름을 꿰뚫는 핵심 문제 제기는 바로 구멍가게 시퀀스가 ‘1. 왜 필요하느냐’, ‘2. 사람들은 왜 그 점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냐’ 이다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은 ‘1. 지영민의 목적은 살인이 아니라 살인의 수사화를 위한 것.’, ‘2. 우연과 작위는 1을 위해 존재했으니 관객이 이것을 승인하느냐 거부하느냐의 문제다였다특히 2번 질문은 사람들이 왜 그 점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냐즉 무의식적인 이야기인데 인데그것에 대한 해답은 없고 승인거부라는 의식적인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이 납득하기 어렵다.

반면 글의 제목은 최종 승리자는 괴물이다이다이 비평문의 서론과 결론초반부가 납득하기 어려운 시퀀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본론과 결론후반부가 제목에 어울리는 내용이었다하나의 글에 두 개의 주제를 끼워 맞췄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또 다른 괴물, <그놈 목소리>

 

비평문을 보면서 이와 유사한 영화를 하나 꼽으라 한다면이라고 생각을 해보니필자에게는 가장 먼저 그놈 목소리가 떠올랐다얼굴도이름도 알 수 없고 오로지 목소리만 알 수 있는 괴물 그놈’. ‘상우의 목숨을 걸고 벌어진 게임그리고 최종적으로 괴물이 승리한다여러모로특히 범죄 영화라는 점그리고 부성애모성애같이 사적 감정이 등장인물을 움직인다는 점 점에서 <추격자>와 비슷하다. <그놈 목소리>와 <추격자>, 그리고 <괴물사이의 관계를 살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모든 작품들은 주제를 갖고 있으며그 주제에 맞는 작가나 감동의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오피스>를 본 후 느꼈던 단점은 너무나도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명확했다는 것이다.


현대 한국 대기업의 폐단을 고발한다는 주제는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이 들락날락 거리는 커다랗지만 폐쇄된 공간인 회사를 배경으로 하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너무나도 뻔한 스토리와 결말은 이 영화에 대한 평점을 깎아먹었다.


마치 이 영화를 한국의 대기업을 비판하는 데에만 너무 치중했다는 느낌이랄까?


영화의 캐릭터와 플롯이 우선이 되고,

그 안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더욱 대중 영화에 맞는 것이 아니었을까?





일단 영화에서 제일 아쉬웠던 점은 캐릭터즉 플롯이 굉장히 약했다.


김병국 과장과 주인공의 캐릭터는 굉장히 겹쳤고나머지 캐릭터들도 그다지 개성이 없었다.


경찰들과 다른 회사원들집단으로만 부류가 나뉘었고그들은 그들만의 개성도정당성도 없었다.


시나리오가 재미있으려면주된 주인공의 가치관에 반대되는 악역의 가치관도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너무나도 악이 명확했으며그에 대항하는 주인공도 결국 또 다른 악으로 복수를 한다.


기존의 시나리오보다부장을 비롯한 회사원들이 김병국과 이미례에게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었던

나름의 개연성과 정당성을 부여했다면 훨씬 좋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그뿐만 아니라 기존의 악에 대항하는 방법도 너무나 안타까웠다.


피해자들이 결국 강한 스트레스로 인해 복수를 한다는 내용인데,

결국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회사의 폐단이 이러니 다 죽여야 한다.’인가?


명확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 채상대방들을 죽여 버리고 끝나버린 내용은

결국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기업에 대한 폐단을 다시 한 번 강조할 뿐이었다.


굳이 환기를 하지 않아도일상생활에서 충분히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말이다.


굳이 환기가 필요하지 않은 사회적 문제점은 그에 대한 해결책이나대안점을 제시해주던가,

아니면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즉 깨닫지 못했던 문제점에 대해 환기를 시켜줬어야 했는데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등장인물을 죽여 대니 그냥 단순한 스릴러 영화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영화의 시나리오가 영화를 위한 것이 아닌비판을 위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스릴러의 느낌을 즐기기 위해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기억에 오래 남을 만큼 감명 깊은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너무나도 명확한 주제와 메시지에영화관에서 나온 직후부터 바로 기억에서 지워져갔다.


하지만 소재는 정말 좋았기에 적절히 플롯을 재구성한다면 충분히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싶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사전적 의미로는 쉬운 일이라도 협력하여 하면 훨씬 쉽다는 뜻이다.


아무리 쉬운 일도 협력하면 더 쉬운데어려운 일을 협력하면 쉬워지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수가 늘어난다면 더더욱.


그런데 이런 점이 사람의 감정에도 적용이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한 가지 잘못을 저지른 것이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라면,

해당 집단의 구성원은 자신의 잘못과 죄책감을 1/n로 나눈다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자신은 1/n만큼혹은 그 이하만큼만 잘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SNS이다.


세계 최고의 IT강국의 위상에 걸맞게인터넷이 가장 발전한 나라인 한국.


장점이 많은 만큼반대로 그로인한 부작용들이 많이 이슈가 되고 있다.


악플을 남기고그 악플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가 극도의 공포감에 자살을 한다면?


아마 악플을 남긴 사람들은,

나 혼자 쓴게 아니니까.’ ,

내가 쓴 건 영향 끼치지 않았을 거야.’ ,

틀린 말을 하진 않았잖아?’


등의 책임을 회피하는 의식을 하게 된다.


일종의 자기방어자기합리화라고도 한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이 인터넷의 익명성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을 한다.


인터넷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세상이고자신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쉽게 악플을 단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저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첫째페이스북 같이 실명을 걸고 하는 SNS에서도 악플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둘째현실에서도 마녀사냥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직장이나 학교 내 따돌림 사건 같이 말이다.





첫 번째의 경우타인에게 욕을 하는 소위 공격자들은 자신이 나름대로의 정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은 충분히 욕먹을 만 해.’ 그렇게 생각하면서 공격자는 자신이 욕하는 대상과 똑같은 짓을 저지른다.


두 번째의 경우는 일종의 대중심리의 영향이 크다.


다른 사람들이나보다 더 높은(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고따라하는 것이다.


왠지 나도 그래야 이 집단에서 배제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왠지 나도 그래야 할 것 같기 때문에.




영화 <소셜포비아에서는 잘 한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 상에서 사칭이나 학력 위조 등의 잘못이 있는 사람들의 신상을 털고 공격을 하는 하영이나,

그런 하영에게 복수하기 위해 SNS를 해킹해서 남자들을 도발한 도더리’ 용민,

용민에게 이끌려 하영에게 악플을 남기고그녀를 찾아간 주인공 지웅.


그리고 그들을 비난하는 제 3자 네티즌까지.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고 있는 아이러니인 셈이다.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의 원인과 동기가 있지만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자신의 행동이 이러한 결과를 불러올 줄 몰랐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회피한다는 것.


그러한 점은 하영의 자살과 그것이 자살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타살일 거라는 이유를 찾아내서 존재하지도 않는 범인을 찾는 데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기어코 가짜 범인을 만들어내 자신의 죄책감을 지운다.


자신의 죄책감을 대신 짊어질 사람을 찾는 것이다.




죄책감도 맞들면 낫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말의 죄책감마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깨끗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로 인해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이러한 문제는 역시 개개인의 의식이 변화되는 것 말고는 해결책이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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