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리뷰는 비평문, '결국 최종 승리자는 괴물이다'를 보고, 그에 대해 쓴 것입니다.*
최종 승리자는 괴물이다
그래서 시퀀스인가, 괴물인가?
억지스러운 구멍가게 시퀀스. 왜 필요했던 것일까?
추격자는 관객이 500만명이 넘은 영화이다. 이 숫자는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음을 방증하는데, 무엇이 그걸 가능케 했을까? 이미 많은 평자들은 추격자의 장점에 대해 지적했다. 하지만 무언가 말해지지 않은 단점이 있다. 그리고 그 단점은 단순히 영화의 흠이 아니라, 영화의 본론과 직결된 것이 담겨 있다. 영화 추격자에는 몇 가지의 우연과 무리한 설정(시퀀스)가 있다. 개미슈퍼 부분이 그것이다. 그래도 이 장면은 스릴러의 속도감을 위한 대가 정도로 여기고 넘어갈 수 있다. 문제는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부분, 바로 그 다음 장면이다. 지영민은 가게 주인과 미진을 죽인 뒤, 미진의 시체를 들고 집으로 갔다.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일까? 그렇다면 왜 그런 우연과 작위를 짊어지고라도 해당 시퀀스가 필요했을까? 관객의 입장에서는 왜 그 무리한 시퀀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을까? 이러한 의문을 던져놓고 영화 <추격자>를 바라본다. 이를 답하기 위해 다른 점들을 먼저 짚고 넘어가보자.
미진과 현서, 게임에 배팅된 제물?
해당 시퀀스의 결말은 바로 미진의 죽음이다. 미진은 꼭 그렇게 죽임을 당하고, 전시가 되어야 했을까? 감독은 이미 미진이 죽는 다는 구상을 통해 결말을 정해놓고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혹시 그녀가 죽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죽음이 우리가 말하지 않은 마음속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와 비교할 만한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괴물>이다. 주인공인 강두의 딸, 현서는 꼭 죽어야 했는가? 하는 의문을 똑같이 던져볼 수 있다. 봉준호 감독 역시 현서의 죽음에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진과 현서의 죽음 같은 비극적 엔딩이 한국에서는 관객에게 위로를 주며, 오히려 상업적 감각처럼 받아들여지는 측면도 있던 것 같다는 봉준호 감독의 말로는 현서와 미진의 죽음을 다 담을 수 없다.
두 영화를 하나의 게임으로 본 다면, <괴물>에서는 현서의 목숨을 두고, <추격자>에서는 미진의 목숨을 두고 벌어진 시합이라고 볼 수 있다. 양 측에서 하나의 존재를 사이에 두고 대결하는 구도를 보면 말이다. 그렇다면 현서와 미진의 목숨은 이 게임에 베팅된 제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죽어야 했는가?’라는 물음은 ‘왜 그들이 게임의 제물로 선택되었는가?’ 라는 질문으로 치환되어야 한다고 (비평문)글쓴이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빙빙 돌아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내놓은 결론은 굉장히 간단하다. 바로 미진은 온갖 위험과 병이 들었다 할지라도 ‘부름’에 거절 할 방법은 없었다는 것, 그리고 <괴물>에서 매일 한강변 노점으로 와야 하는 현서는 한강에 괴물이 나타났을 때 가장 잡아먹히기 쉬운 하층민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라면 왜 중간에 ‘괴물의 승리양상’을 집어넣어 복잡하게 구성 했던 것일까? 결론을 뒤에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정말 저렇게 단순한 이유뿐이었을까? 아니면 황순원의 소나기 ‘난 보랏빛이 좋아’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었음에도 관객의 입장에서 괜한 의미부여를 한 것일까?
그들은 왜 죽어야 했는가? vs 왜 그들이 제물이었는가?
여기서 필자의 첫 번째 의문이 발생한다. (비평문)글쓴이는 그에 대한 근거로 현서와 미진이 왜 죽었는가? 라고 질문하는 순간 그 질문의 휴머니즘적 뉘앙스에 이끌려 우리가 무조건 강두와 중호의 편에 서 있다고 오인하기 쉬우며 동시에 이 영화에서 얻은 감각적 쾌락을 그 질문의 윤리성으로 은폐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라고 말한다. ‘왜 죽어야만 했는가?’ 는 괴물의 편도, 강두 및 중호의 편도 아닌 중립적인 입장에서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과학 시간에 ‘지구는 왜 자전하나요?’와 같은 질문처럼 순수하게 그 이유를 물어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목표를 향해 달려갔는데, 가다 보니까, ‘어? 이게 아니네?’ 하고 다시 되돌아 간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굳이 왜 앞에서 ‘왜 죽어야만 했는가?’라고 거창하게 문제제기를 했을까? 그냥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더 깔끔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웅과 애완동물?
두 번째 의문으로는 (비평문)글쓴이는 한강변에서 마주한 아이의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괴물은 영웅 혹은 애완동물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에 대한 근거로 한강변에서 우리가 괴물에게 쫓긴 적 없고, 한 편의 영화일 뿐이고, 게다가 디지털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괴물을 만나러 <괴물>을 보러 갔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나러 갔다, 능동적으로 찾았다고 해서 그것이 영웅이나 혹은 애완동물이라는 표현은 너무나도 지나친 표현 아닐까? 영웅의 사전적 정의는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네이버 국어사전)’이라고 되어있다. 애완동물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동물’을 뜻한다. 그런데 괴물이 그런가? 단지 한강변에서 괴물을 찾는다고, 괴물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아 갔다고 괴물이 영웅 혹은 애완동물이라는 표현은 다소 잘못된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괴물>의 괴물, 승리양상
<괴물>의 괴물은 지영민과는 달리 단순히 ‘생존’이 목표이다. 생존을 위해 한강을 습격하고, 인간들을 공격해 잡아먹었다. 사자가 사슴을 사냥하듯 말이다. 상위 포식자가 하위 포식자를 사냥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강두의 입장에서야 현서를 놓고 벌이는 시합이었지만, 괴물에게는 그냥 먹이 하나 뺏기느냐 마느냐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싸움에서 괴물은 자신의 최고 목적인 생명을 잃었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 났다면 양자가 모두 패배한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괴물의 탄생 원인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군이 몰래 하수구로 방류한 포름알데히드가 그에 대한 원인이었다. 강두네 가족은 포름알데히드를 불법 방류한 미군과 싸우는 것이 아닌, 그로 인해 나타난 결과물과 싸웠을 뿐이다. 즉, 사건은 해결된 것이 아니라 0의 상태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미제 괴물은 텍스트 내외적으로 매우 강력한 힘과 불멸을 상징하고 있다. 결국 괴물은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었다.
<추격자> 괴물의 승리양상
<추격자>의 괴물은 연쇄살인마다. 게다가 성불구자이며, 하층민이다. 현대 사회에서 남성의 능력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남성, 그 자체로서의 능력. 그리고 경제력. 하지만 지영민은 성불구자에, 하층민이다. 이것을 계급으로 치차면 제일 최하층일 것이다. 그의 계급적 성적 처지를 연쇄살인의 유일한 동기로 내세우는 것은 사실 납득하기 힘들다. 반대로 계급적 성적 처지를 외면하고 그는 전혀 알 수 없는 인물이라고 말해버리는 것 역시 납득하기 힘들다. 하지만 적어도 방류된 독극물이 괴물을 만들어낼 확률 보다는 지영민의 경우가 더 높음에도 나홍진 감독은 영화 밖에서 둘 사이의 연관은 절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추격자>에서의 성적 경제적 상황과 살인마의 관계는 <괴물>에서의 미군의 독극물과 괴물의 관계와 비슷한 점이 있다. 후자가 전자의 결과는 아니다. 하지만 전자의 징후로 인해 태어났으며, 후자와 싸워 이겨도 전자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지영민은 <괴물>의 괴물과는 달리, 생존이 목적이 아니다. 즉, 연쇄살인을 통해서 무언가 이루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영화는 그가 이루려는 것을 징후적으로 드러냈다. 그것은 그가 예술가라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도 종교 예술가 말이다. 영화 내내 지영민과 종교적 기표들은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주목해야할 것은 지영민이 ‘십자가를 향해’ 범죄를 저지른다는 사실이다. 교회 집사 가족을 살해하여 그의 집을 살인의 거처로 삼았고, 창녀들의 머리에 정을 박아 죽였다.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행위를 흉내 내고 있다.
살인의 예술화를 위한 시퀀스
앞서 말했던 것으로 구멍가게의 시퀀스에 대해 정리를 해보자. 이 시퀀스가 왜 필요했을까? <괴물>의 우연들은 무능력한 강두 가족을 위해 마련되었고, 결국 그 우연들에 힘입어 괴물을 죽였다. 반면 <추격자>의 우연과 작위들은 지영민이라는 괴물을 위해 마련됐다. 지영민이 미진을 살해한 뒤, 그녀의 머리와 손을 어항에 넣고 감상한다. 분명히 이야기 전개상으로만 보면 불필요한 장면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장면은 살인 자체가 아니라 살인을 예술화 하는 것이 지영민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 우연과 작위들은 이 순간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문제는 관객이 이를 승인하고 넘어가느냐, 그러지 않으냐 인데, 많은 평자들과 관객들은 그것을 승인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지적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최종 승리자는 괴물이다
지영민을 낳은 저 거대 도시의 질서도, 독극물을 방류하는 미군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괴물을 처치했지만, 결국 제 2, 3의 괴물들은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들이 등장하더라도 또 다른 현서와 미진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 그들이 죽음으로써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반면, 두 괴물은 승리했다.
가난하고 무력한 부성?
결국 게임에서 패배했다는 것, 그리고 <괴물>의 경우, 우연을 통해서 괴물을 죽였다는 것으로 그들을 가난하고 무력한 부성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그들의 힘으로 괴물을 잡았다. 물론 그게 원천적인 해결이 될 수는 없었지만, 직접적인 대상에게는 복수한 셈이다. 그것을 가난하고 무력한 부성이라고 비하할 수 있을까?
글의 흐름을 굳이 이렇게 했어야 했나?
역시 이런 이야기를 할 거면 중간의 이야기는 너무 불필요하게 돌려 말하지 않았나 싶다. 굳이 사이에 현서와 미진이 왜 죽어야 했는지, 두 괴물의 승리양상을 설명해야 됐는지 의문스럽다. 사실 두 개의 주제가 따로 논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저 사이를 싹 다 지워버리고 초반부와 후반부만 남겨둬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아니, 오히려 더 간결해서 납득이 잘 갈 수도 있겠다. 비평문 전체의 흐름을 꿰뚫는 핵심 문제 제기는 바로 구멍가게 시퀀스가 ‘1. 왜 필요하느냐’, ‘2. 사람들은 왜 그 점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냐’ 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은 ‘1. 지영민의 목적은 살인이 아니라 살인의 수사화를 위한 것.’, ‘2. 우연과 작위는 1을 위해 존재했으니 관객이 이것을 승인하느냐 거부하느냐의 문제다’였다. 특히 2번 질문은 사람들이 왜 그 점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냐, 즉 무의식적인 이야기인데 인데, 그것에 대한 해답은 없고 승인, 거부라는 의식적인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이 납득하기 어렵다.
반면 글의 제목은 ‘최종 승리자는 괴물이다’이다. 이 비평문의 서론과 결론초반부가 납득하기 어려운 시퀀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본론과 결론후반부가 제목에 어울리는 내용이었다. 하나의 글에 두 개의 주제를 끼워 맞췄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또 다른 괴물, <그놈 목소리>
비평문을 보면서 이와 유사한 영화를 하나 꼽으라 한다면? 이라고 생각을 해보니, 필자에게는 가장 먼저 그놈 목소리가 떠올랐다.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고 오로지 목소리만 알 수 있는 괴물 ‘그놈’. ‘상우’의 목숨을 걸고 벌어진 게임. 그리고 최종적으로 괴물이 승리한다. 여러모로, 특히 범죄 영화라는 점, 그리고 부성애, 모성애같이 사적 감정이 등장인물을 움직인다는 점 점에서 <추격자>와 비슷하다. <그놈 목소리>와 <추격자>, 그리고 <괴물> 사이의 관계를 살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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