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정의 – 레진코믹스살신성인(殺身成仁)





사형제도는 옳은가?


이에 대한 찬반 논란은 여전히 극심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어느 것도 명확하게 정의(正依)라고 확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 측의 주장을 들어본다면 모두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영원히 결론나지 않는 갑론을박(甲論乙駁)인 이유는 각자의 정의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의라고 믿고 있으니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부딪히기 마련이다.






살신성인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옳은 도리를 수행한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이다.


일종의 희생정신으로뜻만 보면 굉장히 훌륭해 보이고또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웹툰은 그에 대한 허점을 정확히 꿰뚫어 보여주고 있다.


장르만 보면 호러/미스테리 장르의 좀비물이기에 단순한 오락성 웹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반전명확한 메시지는 재미와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 70여화가 넘는 긴 내용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만들었다.


아쉬웠던 점은 진지하고호러스러운 분위기의 스토리지만,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남주라던가,

송장처럼 생긴 캐릭터의 이름이 송장이라던가 하는 장난스러운 작명 센스,

그리고 간간히 들어있는 깨알 개그는 스토리의 분위기를 다소 해치는 느낌을 줬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름대로의 매력일 수 있겠다.




이 작품은 한 사장의 딸이 시험을 보러 가던 중, ‘남주에게 납치 및 감금을 당하면서 시작한다.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이 왜 납치 됐는지 알 수 없었던 사장의 딸은 남주에게 그 사연을 듣게 된다.


회사의 계략으로 좀비가 되어버렸고그 사실을 철저히 숨겨야하는 남주와 그 여동생 남주연.


그들을 감시하기 위한 회사의 사람들남주와 남주연을 살리고 회사를 무너트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하트 일당.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남주의 친구들까지.


그들에겐 그들만의 정의가 있었고그것이 옳다고 믿었다.

   





이 작품에서 사람의 생명을 놓고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상 곳곳에서도 작품과 비슷한 상황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작게는 이성간의 연애 문제부터 크게는 정치 문제까지.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가 완전히 다르다 보니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하게 되며,

결국 다툼까지 벌어지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면에서 접근해 봤을 때살신성인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이고 성스러운 느낌으로만 볼 수 있을까?


최근 부산의 모 국립대학교 교수가 총장 직선제 폐지를 위해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것 역시 자신의 목숨을 버려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기 위한 살신성인적 행동이기는하지만

이 행동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혹자는 옳다고 할 수도혹자는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아마 그들이 각자의 주장을 내세우고 서로를 설득하려 노력한다 하더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정의가 다르기 때문에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언할 수 있다.


적어도 당사자에게 만큼은 그것이 정의였다는 것을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한번 돌이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자신만이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상대방에게도 상대방의 정의가 있다는 것을.










현재 시즌 2까지 나오고 휴재 중에 있는 네이버 웹툰 '찌질의 역사'는 30대 중반이 되어 오랜만에 모인 대학 친구들의 과거 회상에서 부터 출발한다.


바로 그들이 연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기.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던 시기.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또 자신 스스로도 상처를 받았던 시기. 어른이 아니었던, 어른이 되지 못했던 그들의 찌질했던 시기.


수많은 독자들은 주인공들을 보면서 발암이다, 뭐다 하지만 사실 그들의 행동들에 공감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주인공들의 행동은 아무래도 웹툰이고 재미를 주기 위해서 다소 과장된 면도 보이기는 하지만, 보통의 남자들이라면, 자신이 연애를 많이 해보지 못했을 때를 기억해보면 이불킥을 날릴 만한, 주인공과 같은 경험이 있지 않은가?


작품 내용에서 보면 계속해서 어른과 어른이 아닌 자의 대립되는 내용이 나온다.


모든 것을 참고 견뎌내고, 이겨내고 이해하는 어른이 되고 싶은 20살 주인공들과, 아직은 감성적이고 순수하여 찌질해 보이는 시기.


그렇게 찌질하던 주인공들은 몇 번의 경험을 거치면서 점차 어른이 되어간다.


그렇다면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어른은 찌질하지 않고, 20대 초반의 청년은 찌질하다는 이야기?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사실 찌질함이라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 사회 풍념으로 받아들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만 너무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그렇기에 솔직한 것은 찌질함이 되어버린 사회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해하고 참고, 견뎌낸다. 왜 그럴 수 있을까? 더 강해졌기 때문에? 아니다. 작품 내에서도 말했듯이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익숙해졌기 때문에 어렸을때 만큼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경험으로 인해서 그러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계속된 상처에 무뎌져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찌질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아주 순수한 행동이다. 어렸을 때나 가능한, 어른이 아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 찌질했던 자신의 과거 하나하나가 순수했던 자신의 추억이고, 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인간은 없다. 누구든 경험을 통해서 성장해 나가는 것이고, 결국 누구나 처음에는 찌질했었으니까.




사람은 사랑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찌질하다고 표현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그건 당연한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밉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 그렇기에 조심스러워 지는 마음. 모두 당연한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단순히 주인공의 찌질한 과거 스토리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한번 지나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자신의 순수한 과거를 기억해보자, 라는 취지가 아니었을까?




주인공의 역사는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남자들의 역사가 아닐까 싶다.


찌질의 역사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순수했던 나', '아직 어른이 아니었던 나', '세상에 찌들지 않았던 나' 이다.


역사는 현재를 만들고, 현재는 미래를 만든다. 결국 찌질의 역사도 현재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귀중한 과정이었다.





주인공의 행동과 모습에서 내가 겹쳐지는 것 같아 공감의 웃음이 픽하고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속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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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대용이가 사고의 후유증이로 인해서 특수능력을 갖게 된 이야기.

특수능력은 다음과 같다.


1. 상대방의 목소리에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자신에게 호감일 수록 좋은 향기)

2. 상대방과 접촉하면 상대방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다.

3. 타인의 눈과 피부 색을 통해서 그 사람이 곧 죽을 것인지, 누군가를 죽일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3가지 능력이 있지만, 스토리는 거의 3에 초점을 두고 진행이 된다.

능력을 이용해서 사람을 살리려는 대용이.

반대로 능력을 이용해서 사람을 죽이려는 노란머리 투블럭.




대용이는 처음 순수한 마음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귀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 욕망1. 세상에 도움 되는 사람이 되고싶다.

하지만 점차 그로 인해서 거만해졌으며, 자신의 선행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자 불만을 갖는다.
- 욕망2. 자신의 행동을 누가 알아주길 바란다.


이런식으로 욕망은 풍선처럼 충족 될 수록 더욱 커져만 가고, 그것은 곧 불행을 부른다.

작가가 후기에서도 직접적으로 언급한

'욕망이 적은 것이 더 행복하다' 라는 공식을 잘 표현해주는 스토리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가 돈 많고 잘사는 세계 1위의 강대국인 미국이 아니라, 선진국이 다수 분포한 유럽이 아니라,

방글라데시라는 작은 아시아 국가라는 사실도 위의 공식을 증명한다.



그렇다고 꼭 욕망이 없는 것이 좋을까? 욕망이 없는 것만이 행복할까? 이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시스템은

욕망 발생 -> 욕망 충족 -> 만족 -> 행복 -> 또 다른 욕망 발생

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인간은 욕망이 충족됨으로써 행복을 느낀다.

그렇기에 욕망이 적을 수록 쉽게 충족되고, 행복을 느끼기 쉽다는 것이다.

심리학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습관화 현상(어떠한 현상이나 행동 등에 대해서 익숙해져서 긍정적, 부정적인 감정에 무뎌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이 없다면? 인간이 발전할 수 있을까?

당연히 없다.

인간은 욕망 때문에 지금까지 발전해왔고, 또 앞으로도 발전해 나갈것이다.

욕망이 없는 인간은 평범한 하나의 동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더 나은 조건, 더 편한 생활을 욕망하고, 그것이 충족되면 더욱 욕망이 커졌기에

인간은 발전하고, 육지를 정복한 유일한 생명체가 되었다.



결국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세지는 무엇인가?

욕망이 적을 수록 행복하니, 욕망을 최대한 줄여라?

만약 저거라면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인간은 욕망을 느낄 때, 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욕망을 느끼지 못한다.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에 따르면

나 - 욕망의 중개자 - 욕망 

이라는 구조로 되어있다.

예를들어 내가 시계를 사고싶다 라는 욕망을 가지게 됐다면, 그것은 시계를 찬 누군가(욕망의 중개자)를 보고 그 사람을 따라하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발생되어 결국 시계를 구입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서 접근해보자.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은 비교를 좋아한다. 그것은 역시 욕망의 중개자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통해서 욕망을 느끼게 된다. 저 사람과같이 되고싶다, 저 사람보다 나아지고 싶다.

우리나라는 상대적 박탈감이 심하기 때문에 높은 경제 수준에도

자신이 가난하다, 불행하다

라고 생각한다.










욕망이 적으려면 욕망의 중개자도 적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욕망의 중개자가 너무 많다.

더욱이 국제화시대에서 욕망의 중개자는 더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환경에서 욕망을 줄여라?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그건 오히려 자신을 불행에 빠트리는 지름길이다.

물론 도를 닦듯, 세상과 단절(욕망의 중개자의 부재)하게 된다면 욕망이 적어지고

행복을 느끼기 쉬울 수도 있으나

이 역시 자신의 기억이 욕망의 중개자를 떠올리고 있으므로 힘들다.




욕망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

인간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생명체다.

그것을 잊으면 안된다.

때론 욕망은 불행을 몰고 오지만,

대부분의 욕망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 욕망이 강할수록 인간은 노력하게 되고

결국 그것은 보상으로 돌아온다.




이런 말이 떠오른다.

99번 착했던 사람이 1번 잘못하면

저렇게 안봤는데 엄청 나쁜 놈이네 가 되고

99번 나빴던 사람이 1번 잘못하면

되게 나쁜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되게 착하네 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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