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사전적 의미로는 쉬운 일이라도 협력하여 하면 훨씬 쉽다는 뜻이다.


아무리 쉬운 일도 협력하면 더 쉬운데어려운 일을 협력하면 쉬워지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수가 늘어난다면 더더욱.


그런데 이런 점이 사람의 감정에도 적용이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한 가지 잘못을 저지른 것이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라면,

해당 집단의 구성원은 자신의 잘못과 죄책감을 1/n로 나눈다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자신은 1/n만큼혹은 그 이하만큼만 잘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SNS이다.


세계 최고의 IT강국의 위상에 걸맞게인터넷이 가장 발전한 나라인 한국.


장점이 많은 만큼반대로 그로인한 부작용들이 많이 이슈가 되고 있다.


악플을 남기고그 악플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가 극도의 공포감에 자살을 한다면?


아마 악플을 남긴 사람들은,

나 혼자 쓴게 아니니까.’ ,

내가 쓴 건 영향 끼치지 않았을 거야.’ ,

틀린 말을 하진 않았잖아?’


등의 책임을 회피하는 의식을 하게 된다.


일종의 자기방어자기합리화라고도 한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이 인터넷의 익명성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을 한다.


인터넷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세상이고자신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쉽게 악플을 단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저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첫째페이스북 같이 실명을 걸고 하는 SNS에서도 악플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둘째현실에서도 마녀사냥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직장이나 학교 내 따돌림 사건 같이 말이다.





첫 번째의 경우타인에게 욕을 하는 소위 공격자들은 자신이 나름대로의 정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은 충분히 욕먹을 만 해.’ 그렇게 생각하면서 공격자는 자신이 욕하는 대상과 똑같은 짓을 저지른다.


두 번째의 경우는 일종의 대중심리의 영향이 크다.


다른 사람들이나보다 더 높은(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고따라하는 것이다.


왠지 나도 그래야 이 집단에서 배제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왠지 나도 그래야 할 것 같기 때문에.




영화 <소셜포비아에서는 잘 한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 상에서 사칭이나 학력 위조 등의 잘못이 있는 사람들의 신상을 털고 공격을 하는 하영이나,

그런 하영에게 복수하기 위해 SNS를 해킹해서 남자들을 도발한 도더리’ 용민,

용민에게 이끌려 하영에게 악플을 남기고그녀를 찾아간 주인공 지웅.


그리고 그들을 비난하는 제 3자 네티즌까지.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고 있는 아이러니인 셈이다.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의 원인과 동기가 있지만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자신의 행동이 이러한 결과를 불러올 줄 몰랐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회피한다는 것.


그러한 점은 하영의 자살과 그것이 자살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타살일 거라는 이유를 찾아내서 존재하지도 않는 범인을 찾는 데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기어코 가짜 범인을 만들어내 자신의 죄책감을 지운다.


자신의 죄책감을 대신 짊어질 사람을 찾는 것이다.




죄책감도 맞들면 낫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말의 죄책감마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깨끗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로 인해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이러한 문제는 역시 개개인의 의식이 변화되는 것 말고는 해결책이 없는 것일까?










여자들의 우정을 다룬 영화 써니.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의문은 정말 이들이 친한 친구가 맞나?’였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전라도 벌교에서 임나미가 전학 오면서 시작한다.


기존의 6명의 그룹이 7명으로 늘고이름도 써니라고 지으며 친하게 지내던 그녀들은

학교에서 사고를 쳤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게 되고,

25년간 만나지 못하다가 나미가 병원에서 암투병중인 춘화를 만나옛 친구들을 다시 모은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25년 동안 서로 코빼기도 비추지 않다가그제야 뭉쳤는가?


그리고 춘화에겐 고등학교 이후로 사귄 친구가 전혀 없는 것인가?



아무리 퇴학을 당했다고 하더라도일단은 같은 고등학교이고심지어 지방도 아닌 서울이다.


장미네 집에 아이들이 모두 놀러가기도 하고나미가 수지네 집에 직접 찾아간 걸로 봐서서로 집도 그다지 멀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퇴학당했다고 그 이후로 25년간 연락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퇴학당할 당시퇴학 따위가 우리를 떨어트려 놓을 수 없다고 그렇게 울면서 다짐을 했음에도?


물론 학교 다닐 때 보다야 만나는 빈도수가 적어질 수도 있고몇 명은 이사 가서 보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토록 친했던 아이들인데서로 25년간 연락도 한번 안한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심지어작품 중에서는 얼굴에 상처가 난 수지가 앰뷸런스에 실려 간 것이 그녀들 기억의 마지막인 것처럼 나온다.


여기서 또 들었던 생각은 병문안도 안가나?’ 였다.


처음 봤을 때는얼굴을 다쳐 흉터가 남았다는 충격으로 집 안에서만 지냈구나라고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토록 친했던 친구인데, (사실 얼굴에 상처가 난 것이 외관상 끔찍해서 그렇지)

생명에 지장이 있다거나 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도 아닌데 병문안 정도는 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나미가 수지네 집을 찾아갈 정도라면병원 위치를 알아내고찾아가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텐데그들은 왜 병문안을 가지 않았는가?



또한 춘화는 고등학교 이후로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이 그렇게 없었는가?


작품에서 드러내지 않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남은 재산을 써니 멤버에게 줬다는 장면은,

아무리 그들이 소중한 친구들이었지만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든다.


그들에게 남겨줬다는 것 자체가 의문점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그들에게만 남겨줬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거다.

그렇다면 춘화에게는 25년 전의 고등학교 친구들 빼고는 소중한 사람이 모두 없다는 뜻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어가기엔 조금 억지스럽지 않나 싶다.



써니라는 영화가 주는 감동적인 스토리는 분명히 대단하다.


실현이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스토리 사이사이의 개연성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이러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억지로 짜 맞춘 느낌?


스토리 진행을 위해 그들을 억지로 친해지게 만들고억지로 퇴학(해체)시키고암에 걸리게 하고.


감동과 재미라는 장점으로 억지라는 단점이 꼭꼭 숨겨진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각자의 정의 – 레진코믹스살신성인(殺身成仁)





사형제도는 옳은가?


이에 대한 찬반 논란은 여전히 극심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어느 것도 명확하게 정의(正依)라고 확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 측의 주장을 들어본다면 모두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영원히 결론나지 않는 갑론을박(甲論乙駁)인 이유는 각자의 정의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의라고 믿고 있으니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부딪히기 마련이다.






살신성인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옳은 도리를 수행한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이다.


일종의 희생정신으로뜻만 보면 굉장히 훌륭해 보이고또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웹툰은 그에 대한 허점을 정확히 꿰뚫어 보여주고 있다.


장르만 보면 호러/미스테리 장르의 좀비물이기에 단순한 오락성 웹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반전명확한 메시지는 재미와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 70여화가 넘는 긴 내용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만들었다.


아쉬웠던 점은 진지하고호러스러운 분위기의 스토리지만,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남주라던가,

송장처럼 생긴 캐릭터의 이름이 송장이라던가 하는 장난스러운 작명 센스,

그리고 간간히 들어있는 깨알 개그는 스토리의 분위기를 다소 해치는 느낌을 줬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름대로의 매력일 수 있겠다.




이 작품은 한 사장의 딸이 시험을 보러 가던 중, ‘남주에게 납치 및 감금을 당하면서 시작한다.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이 왜 납치 됐는지 알 수 없었던 사장의 딸은 남주에게 그 사연을 듣게 된다.


회사의 계략으로 좀비가 되어버렸고그 사실을 철저히 숨겨야하는 남주와 그 여동생 남주연.


그들을 감시하기 위한 회사의 사람들남주와 남주연을 살리고 회사를 무너트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하트 일당.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남주의 친구들까지.


그들에겐 그들만의 정의가 있었고그것이 옳다고 믿었다.

   





이 작품에서 사람의 생명을 놓고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상 곳곳에서도 작품과 비슷한 상황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작게는 이성간의 연애 문제부터 크게는 정치 문제까지.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가 완전히 다르다 보니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하게 되며,

결국 다툼까지 벌어지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면에서 접근해 봤을 때살신성인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이고 성스러운 느낌으로만 볼 수 있을까?


최근 부산의 모 국립대학교 교수가 총장 직선제 폐지를 위해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것 역시 자신의 목숨을 버려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기 위한 살신성인적 행동이기는하지만

이 행동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혹자는 옳다고 할 수도혹자는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아마 그들이 각자의 주장을 내세우고 서로를 설득하려 노력한다 하더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정의가 다르기 때문에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언할 수 있다.


적어도 당사자에게 만큼은 그것이 정의였다는 것을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한번 돌이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자신만이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상대방에게도 상대방의 정의가 있다는 것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