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복합적 감정의 동물이다. 하루에도, 아니 찰나의 순간에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하기도 한다. '인사이드 아웃'은 그러한 감정과 그 변화들을 캐릭터를 통해서 재미있게 풀어서 보여주고 있다.

(일단 인간의 감정을 캐릭터화 시켜서, 그들이 조종을 함으로써 인간의 감정이 바뀐다는 상상을 해낸 제작진에게 박수를 보낸다. 특히 이 영화의 장점은 애니메이션답게 풍부한 상상력과 겉으로 보면 굉장히 단순해보이는 스토리를 갖고 있지만, 그 안에 내포하는 의미가 커서 어린아이는 물론 성인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할 포인트는 인간에게 가장 큰 감정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는 기쁨과 슬픔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의문점이 발생되었다. 왜 다른 아이들은 제각각 색이 다른데, 기쁨이와 슬픔이만 같을까? 그 둘은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이 푸른 색으로 같았다. 처음에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후반부에 들어서야, 아하! 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슬픔이는 부정적, 그 자체였다. 기쁨이의 주도 하에 라일리의 기억은 행복한 기억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라일리의 가족이 미네소타에서 센프란시스코로 이사하면서부터 슬픔이는 자기 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런 슬픔이 때문에 기쁨이는 깜짝 놀라 그녀를 제지하려고 하지만, 슬픔이는 기쁨이의 말을 듣지 않았다. 갈수록 상황을 악화시키며, 핵심 기억들까지 행복했던 기억에서 슬픈 기억으로 바꿔버리려고 하고 만다. 결국 그러한 소란 속에서 기쁨이와 슬픔이는 불의의 사고로 인해 장기기억장소로 튜브를 타고 이동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다른 감정들이 기쁨이를 대신해보려고 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기쁨이와 슬픔이는 그곳을 헤매며 본부로 돌아갈 길을 찾아나선다. 그러는 와중에 라일리는 점차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감정과 기억들이 망가져간다. 그 와중에 슬픔이는 기쁨이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 망정, 드러누워버리면서 극혐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여기까지만 봐서는 슬픔이라는 감정은 정말 아무짝에 쓸모없는, 도움이 1도 안되는, 라일리에게서 필요가 없는 감정으로만 비춰졌다. 차라리 슬픔이를 버리고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말이다.






서둘러 본부로 돌아가야하는 그들에게 나타난 라일리의 상상속의 친구 '빙봉'을 만나며 돌아갈 실마리와 함께 결정적인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된다. 그것은 바로 기쁨과 슬픔은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것. 이 깨달음을 주는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빙봉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 기쁨이는 긍정의 힘으로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덮어버리듯 말이다. 라일리가 가족과 이사왔을 때, 기대 이하의 집상태에 가족들 분위기가 안좋자, 부모님에게 장난을 걸면서 그 분위기와 기분을 이겨내려고 하듯. 이처럼 빙봉이 달나라로 갈 로켓을 잃어버렸을 때, 기쁨이는 긍정의 힘으로 그를 위로해보려 한다. 하지만 빙봉은 더욱 서럽게 펑펑 울 뿐이었다. 당황한 기쁨이를 제치고 슬픔이는 빙봉에게 다가가 그에게 '공감'해주었다. 그를 억지로 위로하고, 조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그리고 그의 감정을 '존중'하며 같이 슬픔을 느껴주었다. 그러자 곧 빙봉은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밝은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현대 사회에는 무작정 긍정적인 모습을 강요하고 있다. 긍정의 힘이다, 좋은 일만 생각해라, 슬픔을 이겨내라, 힘내라, 하지만 그런 말을들은 우리는 과연 힘이나는가? 만약 당신이 힘이 났다면, 그것은 그의 '말'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때문인가?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것도 작은 일에서나 그 마음이 도움이 되지, 자신이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큰 일 앞에 좌절하고 슬퍼할 때, 누가 다가와서 힘내라, 화이팅, 다 잘될거야 따위의 말을 해댄다면 과연 힘이 나던가? 기분이 좀 풀어지던가? 혹은 실연을 겪거나 위기에 봉착해서 자신에게 고민상담을 하는 친구에게 거침없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뻔한 방법론적인 조언을 해주면 그 친구가 좋아하던가?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설픈 조언이나 위로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공감'해주는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자신이 정말 너무 힘들어서 이겨내기 힘들 때, '그럴 땐 힘이 드는게 당연한거야. 힏들땐 힘 내지 않아도 돼. 힘이 안나는데 어떻게 힘을 내겠니.' 라는 말이 너무나도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자신이 실연에 빠져 괴로워할때, '너보다 더 괴로운 사람도 많다. 네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니 이겨내라.' , '세상에 여자는 많다',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진다' 따위의 말을 하는 것보다 '괜찮니?' '정말 힘들겠다.' '그럴땐 펑펑 울어도 돼' 하고 말해주는게 도움이 되지 않던가?





큰 것을 갖고 있는 것은 좋지만, 역시 큰 것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은 그만큼 크다. 즉, 행복한 나날들이 일거에 사라진 라일리의 감정은 슬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긍정이라는 것으로 슬픔을 억누르고 덮으려고 해봤자, 그 슬픔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더욱 곪아버려 언젠간 터져버리고 만다. 그것이 파란 구슬을 기쁨이가 만지더라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유이다. 자신이 슬플때는 우는 방법 등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감정의 배출, 카타르시스)를통해서 그 슬픔을 소비해야한다. 그래야 그 슬픔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기쁨이 들어찰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쓸모없는 감정은 없다. 마지막에 여러가지 색들이 알록달록 빛나는 구슬들처럼, 여러가지 감정들이 조화롭게 어울려야 비로소 진정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 될 수 있다. 기쁨이 지나치게 주도권을 쥐고 있으면 억눌린 슬픔이 언젠가 터지듯, 모든 감정들이 치우침없이 조화롭게 분배되고, 또 그러한 감정들을 부정하지 않고 표현하고 존중해야 한다. 우리가 소중한 만큼, 우리의 감정 또한 소중하다.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느끼는대로 느끼자. 





현재 시즌 2까지 나오고 휴재 중에 있는 네이버 웹툰 '찌질의 역사'는 30대 중반이 되어 오랜만에 모인 대학 친구들의 과거 회상에서 부터 출발한다.


바로 그들이 연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기.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던 시기.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또 자신 스스로도 상처를 받았던 시기. 어른이 아니었던, 어른이 되지 못했던 그들의 찌질했던 시기.


수많은 독자들은 주인공들을 보면서 발암이다, 뭐다 하지만 사실 그들의 행동들에 공감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주인공들의 행동은 아무래도 웹툰이고 재미를 주기 위해서 다소 과장된 면도 보이기는 하지만, 보통의 남자들이라면, 자신이 연애를 많이 해보지 못했을 때를 기억해보면 이불킥을 날릴 만한, 주인공과 같은 경험이 있지 않은가?


작품 내용에서 보면 계속해서 어른과 어른이 아닌 자의 대립되는 내용이 나온다.


모든 것을 참고 견뎌내고, 이겨내고 이해하는 어른이 되고 싶은 20살 주인공들과, 아직은 감성적이고 순수하여 찌질해 보이는 시기.


그렇게 찌질하던 주인공들은 몇 번의 경험을 거치면서 점차 어른이 되어간다.


그렇다면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어른은 찌질하지 않고, 20대 초반의 청년은 찌질하다는 이야기?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사실 찌질함이라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 사회 풍념으로 받아들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만 너무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그렇기에 솔직한 것은 찌질함이 되어버린 사회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해하고 참고, 견뎌낸다. 왜 그럴 수 있을까? 더 강해졌기 때문에? 아니다. 작품 내에서도 말했듯이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익숙해졌기 때문에 어렸을때 만큼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경험으로 인해서 그러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계속된 상처에 무뎌져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찌질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아주 순수한 행동이다. 어렸을 때나 가능한, 어른이 아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 찌질했던 자신의 과거 하나하나가 순수했던 자신의 추억이고, 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인간은 없다. 누구든 경험을 통해서 성장해 나가는 것이고, 결국 누구나 처음에는 찌질했었으니까.




사람은 사랑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찌질하다고 표현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그건 당연한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밉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 그렇기에 조심스러워 지는 마음. 모두 당연한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단순히 주인공의 찌질한 과거 스토리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한번 지나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자신의 순수한 과거를 기억해보자, 라는 취지가 아니었을까?




주인공의 역사는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남자들의 역사가 아닐까 싶다.


찌질의 역사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순수했던 나', '아직 어른이 아니었던 나', '세상에 찌들지 않았던 나' 이다.


역사는 현재를 만들고, 현재는 미래를 만든다. 결국 찌질의 역사도 현재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귀중한 과정이었다.





주인공의 행동과 모습에서 내가 겹쳐지는 것 같아 공감의 웃음이 픽하고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속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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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대용이가 사고의 후유증이로 인해서 특수능력을 갖게 된 이야기.

특수능력은 다음과 같다.


1. 상대방의 목소리에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자신에게 호감일 수록 좋은 향기)

2. 상대방과 접촉하면 상대방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다.

3. 타인의 눈과 피부 색을 통해서 그 사람이 곧 죽을 것인지, 누군가를 죽일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3가지 능력이 있지만, 스토리는 거의 3에 초점을 두고 진행이 된다.

능력을 이용해서 사람을 살리려는 대용이.

반대로 능력을 이용해서 사람을 죽이려는 노란머리 투블럭.




대용이는 처음 순수한 마음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귀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 욕망1. 세상에 도움 되는 사람이 되고싶다.

하지만 점차 그로 인해서 거만해졌으며, 자신의 선행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자 불만을 갖는다.
- 욕망2. 자신의 행동을 누가 알아주길 바란다.


이런식으로 욕망은 풍선처럼 충족 될 수록 더욱 커져만 가고, 그것은 곧 불행을 부른다.

작가가 후기에서도 직접적으로 언급한

'욕망이 적은 것이 더 행복하다' 라는 공식을 잘 표현해주는 스토리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가 돈 많고 잘사는 세계 1위의 강대국인 미국이 아니라, 선진국이 다수 분포한 유럽이 아니라,

방글라데시라는 작은 아시아 국가라는 사실도 위의 공식을 증명한다.



그렇다고 꼭 욕망이 없는 것이 좋을까? 욕망이 없는 것만이 행복할까? 이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시스템은

욕망 발생 -> 욕망 충족 -> 만족 -> 행복 -> 또 다른 욕망 발생

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인간은 욕망이 충족됨으로써 행복을 느낀다.

그렇기에 욕망이 적을 수록 쉽게 충족되고, 행복을 느끼기 쉽다는 것이다.

심리학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습관화 현상(어떠한 현상이나 행동 등에 대해서 익숙해져서 긍정적, 부정적인 감정에 무뎌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이 없다면? 인간이 발전할 수 있을까?

당연히 없다.

인간은 욕망 때문에 지금까지 발전해왔고, 또 앞으로도 발전해 나갈것이다.

욕망이 없는 인간은 평범한 하나의 동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더 나은 조건, 더 편한 생활을 욕망하고, 그것이 충족되면 더욱 욕망이 커졌기에

인간은 발전하고, 육지를 정복한 유일한 생명체가 되었다.



결국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세지는 무엇인가?

욕망이 적을 수록 행복하니, 욕망을 최대한 줄여라?

만약 저거라면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인간은 욕망을 느낄 때, 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욕망을 느끼지 못한다.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에 따르면

나 - 욕망의 중개자 - 욕망 

이라는 구조로 되어있다.

예를들어 내가 시계를 사고싶다 라는 욕망을 가지게 됐다면, 그것은 시계를 찬 누군가(욕망의 중개자)를 보고 그 사람을 따라하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발생되어 결국 시계를 구입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서 접근해보자.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은 비교를 좋아한다. 그것은 역시 욕망의 중개자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통해서 욕망을 느끼게 된다. 저 사람과같이 되고싶다, 저 사람보다 나아지고 싶다.

우리나라는 상대적 박탈감이 심하기 때문에 높은 경제 수준에도

자신이 가난하다, 불행하다

라고 생각한다.










욕망이 적으려면 욕망의 중개자도 적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욕망의 중개자가 너무 많다.

더욱이 국제화시대에서 욕망의 중개자는 더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환경에서 욕망을 줄여라?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그건 오히려 자신을 불행에 빠트리는 지름길이다.

물론 도를 닦듯, 세상과 단절(욕망의 중개자의 부재)하게 된다면 욕망이 적어지고

행복을 느끼기 쉬울 수도 있으나

이 역시 자신의 기억이 욕망의 중개자를 떠올리고 있으므로 힘들다.




욕망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

인간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생명체다.

그것을 잊으면 안된다.

때론 욕망은 불행을 몰고 오지만,

대부분의 욕망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 욕망이 강할수록 인간은 노력하게 되고

결국 그것은 보상으로 돌아온다.




이런 말이 떠오른다.

99번 착했던 사람이 1번 잘못하면

저렇게 안봤는데 엄청 나쁜 놈이네 가 되고

99번 나빴던 사람이 1번 잘못하면

되게 나쁜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되게 착하네 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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